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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향미 시인 / 호모사피엔스를 추억하며
새로 만든 일곱 번째 눈알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짙은 코발트블루 형광색을 주입해주세요 오른쪽 귓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요 피어싱을 조금 큰 것으로 바꿔주세요 새로 나온 상아로요 복원력이 뛰어난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워요 여름동안 냉장고에 보관해주세요 겨울용이라고 표기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부화를 기다리는 젖가슴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나요 일란성 쌍생아처럼 똑같은 모양은 참을 수 없어요 크기에 특별히 신경 써 주실 거죠 직립보행이 슬몃 지겨워요 기린의 긴 다리뼈는 가격이 만만치 않아요 당분간 두 다리의 불편을 감수해야 해요 진화가 느린 관절이 늘 문제예요 수선한지 일주일 째, 꼬리지느러미가 자꾸 가려워요 2009년산 줄기세포에 문제가 생겼어요 싱싱한 상어지느러미는 언제 들어오나요 예약해 둘게요 맛있게 요리해 주실 수 있죠
『시선』2009 가을호 『시향』2009 겨울호 현대시 펼처보기 50선
천향미 시인 / 골뱅이
푸른 눈을 뜨고 밤 세운 골뱅이들이 출근 엘리베이터 앞에 늘어섰다 각기 등번호가 다른 스물네 마리 @이들 일제히 엘리베이터 내벽을 기어오를 참이다 골뱅이가 틈입하고 싶은 곳은 어딜까 반딧불이가 길 밝히는 1급수일까, 확인 차 18번 골뱅이를 가재 잡듯 찍어본다 빠른 수직 이동이다 아하, 골뱅이도 반딧불이처럼 비상을 꿈꾸고 있었구나 컴퓨터에 익숙한 @들 허공에 매달려 주문을 외우고 현실의 나는 반딧불이처럼 @속으로 빠르게 흡수되어야 한다 나의 미행을 감지했는지 세상을 향해 긴급 타전을 보내는 재빠른 손놀림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수많은 @가 쏟아져 제각각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늦은 밤, 내 안에도 골뱅이가 켜는 등불 환하다
계간『서시』2007 가을호
천향미 시인 / 뿔
나는 뿔이 갖고 싶었다. 이른 봄 머위햇순처럼 모 없이 둥근 뿔 하나 갖고 싶었다. 내 뿔에 들이받힌 상처부위마다 솔솔 향기 퍼지는 그런 뿔 하나 갖고 싶었다. 어릴 적 풀 먹이던 우리 집 뿔난 염소 길고 무섭지만 뿔끝이 돌돌 말려 어느 누구에게도 뿔질한번 못해본 허울뿐인 어머니 뿔 자운영꽃잎 같은 재롱 한 묶음 뜯어다 어머니 앞에 내밀면 벅찬 실의에도 치머리 흔들지 않는 어머니 뿔, 삶의 비애가 버선목이라면 홀라당 까뒤집어 보여주고 싶다던 어머니의 뿔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머니 버선코에서 자란 눈물 비친 뿔 하나를 보았으니 내안에 숨은 가시들 뾰족한 뿔로 자라고 있었으니 그것이 어머니를 들이박던 뿔이었음을 그때는 까맣게 몰랐으니
계간<창작21> 2008 봄호
천향미 시인 / 왜가리
방게들 소풍 떠난 하구언 개펄, 뾰루지가 송송한 소녀 가장들 철새와 몸 섞는다 나는 단체사진 뒷줄 키 낮은 언니처럼 뒤꿈치를 고아올리고 캔버스 뒤에 섰다 할머니를 졸라 문방구 전자게임기 쪼고 있을 동생 닮은 도요, 한복 곱게 차려입고 먼 길 떠난 엄마의 초상화 닮은 큰오리, 잽싸게 생선토막 물고 달아나는 검정고양이 닮은 개리 소녀는 차곡차곡 부엌설거지 하듯 화구에 철새를 담는다 때마침 대각선으로 비껴나는 청둥오리의 물방구질에 노을이 엎질러져 불타는 개펄 모가지를 비틀고 한쪽만 바라보고 선 왜가리, 는 왜 그리지 않느냐고 물새처럼 조용히 물었는데 소녀는 돌연 부리보다 예리한 붓끝으로 왜가리 머리에 피가 나도록 쪼아댄다 ‘계절이 바뀌어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고 했지 않느냐, 허구한 날 한쪽다리 가슴에 묻고 갈대울음으로 섰느냐’ 캔버스위로 솟구친 소녀의 붓끝이 놀빛보다 붉다
계간『서시』2007 가을호
천향미 시인 / 부끄러운 오독
천전리각석<♂♀§◇∵???≪≫∞??¤?‡> 앞에서 암반에 새겨진 선사시대의 기호를 친구들에게 떵떵거리며 읽어준 적 있었다 대곡리 공순이를 두고 내곡리 공돌이와 본동 공탁이가 삼각관계였는데 종내 양가의 싸움이 패거리싸움으로 발전하고
와중에 쫒고 쫒기는 혼란이
맑은 개울을 공룡지난 흔적처럼 핏빛으로 찍어 갔는데 무려 그 기간이 장장 했다 각석의 파손 부분은 해독이 어렵고 특히 <작은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족장의 당부가 간곡하게 새겨져 있음을 설명해준 적 있었다 그로부터 십년 후 나는 천전리각석 앞에 다시 서서 과거의 오독 앞에서 굴신중이다 대곡리 공순이와 내곡리 공돌이의 뜨거운 사랑이 활화산으로 솟구쳤으며 시인이 시를 짓고 노래할 때 굽은 달빛이 출렁출렁 강물을 견인함으로써 늘 화려했다고 씌어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특히 <사랑은 바위에도 홈을 판다>는 성기가 큰 부족장의 언명이고 보면, 파손부분이 복구되는 날
나는 다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될 것을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계간『서시』2007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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