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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향란 시인 / 가인의 후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

최향란 시인 / 가인의 후예

 

 

멸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반항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하여

내 안에서

내 밖에서

화해가 불가능한 채

번민과 혼돈의

어둠 속에 남겨진 채

다시금

지나온 그같은 길을

조심스레 또 더듬으며

감지되지 않는 시간의 점들을 좇아

어둠 속에서 빛을 구하며

오늘도

하늘과 땅 사이로

삶을 끌고 간다

존엄하고도 슬픈  몸부림으로

 

 


 

 

최향란 시인 / 들짐승

 

 

지친 해는 바다 속으로 잠겨들고

어스름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해변의 숲 속

내가 뉘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뉘인지 알려고도 않으면서

단지 방어와 공격의 웅크림 속 작은 들짐승 한 마리

 

나는 나는

아침 나절의 흩어지는 안개같으며

나는 나는

풀섶에 대롱거리는 이슬같으니

두려워도 말고

경계도 말고

네 고운 털을 차가운 내 볼에 비비려므나

 

순수와 사랑을 잃고

적막의 파도에 밀려 벼랑 끝에 선 나를

어두움 밖으로 내치질 말고

네 순수한 가슴을 내 무릎에 부비려므나

차갑고 어두운 이 한 밤의 해변에

나그네가 나그네를 반기는

정겨운 포장을 쳐보자

빛나는 별과 부서지는 파도 사이에

 

 


 

 

최향란 시인 / 시리도록 그리운 날

 

 

하루 해 끝 마을버스

제법 야무지고 기름진 30대 여승객의 목소리가

차바퀴와 함께 쉼없이 굴러

흔들리는 운전기사의 벗겨진 뒷머리에

부딪히고 또 부딪힌다

잘못계산되었다는 800원으로 그녀는 무얼할 수 있을까

모두의 귀는 열려있으나 모두의 입은 닫혀있다

 

12월의 날씨보다도 야박해진 이땅의 마음

됫박에 보리 한줌 더 담던

신문봉지에 콩나물 한움큼 더 얹던

둔탁하나 넉넉했던 그시절

두렁상에 보리밥에 김치콩나물국 하나 놓고도

가난하나 따뜻했던 그 시절

 

궁했던 그시절이

시리도록 그리운 날

 

 


 

 

최향란 시인 / 이런 날이 오리라곤…

 

 

푸른 신호등이 켜지자

저마다 부지런히 길을 건넙니다

반신을 절름대는 노인이

신호등의 허락 사이를 분주히 걸어갑니다

그는 이런 아픈 날이

그는 이런 느린 날이

이렇게 오리라 몰랐을 겁니다

 

달리던 버스가 멈추자

저마다 분주히 뛰듯 내립니다

무거운 보따리를 든 노인이 내립니다

버스가 떠날세라

짐보다 무거울 긴강으로 내려섭니다

그는 운전대를 놓을 날이

그는 혼자 장을 보아야할 날이

이렇게 오리라 몰랐을 겁니다

 

산자락에 접어드니

이사람 저사람 분주히 지나갑니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이 언덕을 오릅니다

등짐은 가벼워보이나

심각한 무게의 표정을 담고

외로운 발걸음을 내디딥니다

그는 이토록 일없는 날이

그는 이토록 외로운 날이

이렇게 오리라 몰랐을 겁니다

 

산아래 약수터엔

유치원 아이들이 재잘댑니다

아침 견학길에 말도 많습니다

표정은 봄날 같습니다

소리는 참새 같습니다

그들은 모를 겁니다

외로운 날이 오리라는 것을

일없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아픈 날이 오리라는 것을

 

 


 

 

최향란 시인 / 잠시 걸음을 멈추리라

 

 

그 어느날  문득

석양의 햇살에 시선이 묶여

순간 앞에

걸음을 멈추어보았는가

 

그 어느날 문득

예기치 아니한 슬픔에 마음이 묶여

사연 앞에

걸음을 멈추어보았는가

 

그 순간이

나를 만지도록

내 마음이

그 순간을 만지도록

 

그간 너무 많은

아름다운 순간을 놓쳤기에

그간 너무 많은

소중한 순간을 놓쳤기에

시선이 묶이는 곳마다

잠시

아주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리라

 

그 순간이

나를 만지도록

내 마음이

그 순간을 만지도록

 

 


 

 

최향란 시인

전남 여수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으로 『밖엔 비, 안엔 달』(리토피아, 2013)이 있음. 여수 해양문학상 시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