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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연 시인 / 폐차
십 수 년 타던 차를 폐차시켰다 걷거나 굴러갈 수 없다는 건 동력을 끊어야한다는 것, 가끔은 부속 내부를 들여다보며 안부를 묻거나 윤활유를 공급해주기도 했지만 낡은 뼈나 쇠붙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언덕을 오르거나 평탄한 길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쿨럭거리던 아버님도 걸음을 멈추셨다
한 여름 땡볕 아래서 과열된 차량처럼 기력을 소진한 아버님, 영양제 공급으로 과열된 엔진을 식혔더라면 관절 마디에서 고철 삭는 신음은 흘러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장 난 경음기 소리로 탄식하였다 녹슬거나 낡은 차가 굴러가는 것은 고목나무에 매달린 이파리가 바람을 맞는 일
마모되거나 녹슨 부위를 들어내고 수리하여도 삭고 무른 자리의 회복은 언제나 원점이었다.
현상연 시인 / 우울한 지갑
전생에 초원을 달리던 계절은 가죽으로 복제되었지 짐승의 본성 숨길 수 없어 비가 오면 비릿한 냄새에 끌려 빌딩 숲이나 거리를 방황하기도 했지 그런 날은 가죽이 부활이라도 할 듯 야생의 소리를 내며 돌아 다녔지 영역표시가 된 곳으로 바람이 불어갈 때마다 오줌 같은 가죽냄새가 번져왔지 고삐도 없이 명품이란 허영에 매였지만 뼛속까지 숨겨진 혈통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 어떤 날은 인파속으로 사라진 가방 혹은 구두를 보고 야생의 무리인 듯 쫓아가지만 눅눅한 동족의 초원을 찾을 수 없어 몇 날 몇 칠을 다시 방황하였지 방황이란 모든 기억을 실종시키는 것인지 사람이란 짐승들은 취중에 종종 나를 잃어버렸지 그럴 때면 공원 벤치나 유원지에 앉아 본성 아닌 본성으로 두둑해진 뱃속이 꼭 외상장부 같다는 생각을 하였지
현상연 시인 / 화상
라면을 끓여 상에 놓다가 쏟았다 냄비와 불의 관계는 멀지만 라면과 국물의 관계는 뜨겁다 뜨거운 국물이 옷자락을 적셔 생살을 무는 듯 통증이 번져 부어오른다 화상의 흔적은 국물 혹은 진물일 것이다 화기가 지난 곳마다 통점이 점령을 당하고 주둔지의 막사처럼 물집이 집을 짓는다 수포는 아픔의 관계들이 모여드는 곳, 습하거나 끈적한 곳은 고통의 은신처 바늘로 물집을 허물어본다 손에 뜯겨나는 살점이 거푸집처럼 무너진다 먹구름 드리운 날에는 데인 상처가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가려워 온다 눈을 감아도 불길로 솟아오르는 굳은살 불면의 어둠속에서 긁는 가려운 살갗, 한숨을 뱉어내는지 밤바람소리에 살 비늘이 우수수 떨어진다.
현상연 시인 / 길, 혹은 상처
먹구름 아래서는 누구나 멈칫거린다 멈칫거리는 것은 갈등 혹은 고민의 뇌파가 출렁거리기 때문이다 밤을 갈등 혹은 고민으로 밝히며 많은 사람과 사랑이 걸어 간 길, 나도 상처를 내며 걷는다
고독이나 외로움은 늘 상처로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길은 기억하고 있다 간혹, 외로움은 폭풍을 몰고 오기도 하지 늑골근처 아니면 명치끝 어디쯤 컴컴한 곳에 움츠리고 있는 것, 끝내 내뱉지 못하는 말 한마디가 길 잃은 길이 되어 목구멍에 눌러 붙어있는 가래처럼 끈적인다
눅눅한 시간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먹구름 아래에서 멈칫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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