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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돈 시인 / 여름을 건너간 슬픔
보도블록이 깔린 플라타너스 길을 걸으면,
매미의 울음소리가 쩍쩍 갈라진 여름을 엮는다. 젊은 날 죽은 베르테르가 떠오르고, 김수영 시인이 자박자박 지나간다. 콕, 콕 찍어 먹는 팥빙수가 생각나고, 푸르게 푸르게 빛나던 어린아이의 눈동자가 수채화로 태어난다
보도블록의 존재가 재확인되는 늘어진 오후의 플라타너스 길을 걸으면,
여름인데도 흰 눈이 내리고, 붉은 우체통에 반송되는 당신의 부재가 그리움의 씨앗으로 흩어지고, 조금씩 낡아지는 당신의 페이지가 검은 건반이 있는 피아노에 걸어간다
어느 해부터인가, 플라타너스 길엔 가을이 오지 않았고, 초겨울의 작은 문턱으로 가는 새떼의 줄을 마른 풀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편서풍 부는 플라타너스 길가엔 틈과 틈 사이를 횡단하는 당신의 목소리가 중저음으로 전송될 뿐
길바닥에 나뒹구는 먼지와 오가는 사람들의 접힌 슬픔이 훠이훠이 여름을 건너갔다
최해돈 시인 / 간격
저녁 무렵, 나무와 나무의 거리가 천천히 좁아진다. 나와 길 끝 사이의 아득한 거리가 점점 좁아진다. 침묵의 언어들이 타닥타닥 팔딱거리는 까닭일까, 길 건너 적색 신호등 불빛이 파란불로 변색하면서 세상의 한쪽이 흔들리는 까닭일까. 그야말로 어둠의 잔뼈들이 시간이란 이름으로 내게 걸어오는 저녁 무렵,
직조된 틈이, 틈을 쉼 없이 잉태한다. 눈발처럼
돌아보면 틈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것. 틈은 그대와 나 사이에 흩날리는 흙먼지, 그가 오늘을 울며 내일로 비행하고 있다.
달팽이 숨 쉬는 여기는 목요일. 오늘은 나무토막처럼 짤막한 목요일. 목요일이 목요일을 소처럼 끌며 간다. 목요일이 목요일의 몸살을 앓고 있다. 목요일과 목요일의 저 간격이 목요일과 목요일의 울음을 흰 종이에 4B연필로 기록하고
사람들은 12월의 길을 가면서 아픈 상처를 기억한다. 그 상처가 저녁별이 되어 점점 깊어 갈수록 너와 나의 간격을 확인한다. 너와 나의 간격에 장작불을 지핀다.
어둠이 가득 깔리는 저녁 길가의 한복판,
간격과 간격이 느슨해진 경계선에 겨울새떼들 웅성거리니 간격과 간격이 다시 팽팽해진다. 닫혔던 뚜껑이 다시 열리고 세상이 안단테로 읽히는 간격, 간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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