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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추종욱 시인 / 태평양을 건넌 식물도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3.

추종욱 시인 / 태평양을 건넌 식물도감

 

 

태평양을 건너 LA에서 이주해온 식물도감 12페이지에서 엘레지를 본다

<자주색으로 6개의 꽃잎과 산지의 비옥한 나무 그늘에서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초이다>

를 읽고 나도 모르게 누나하고 불렀다

나는 식물도감에서 패랭이꽃, 달맞이꽃, 엘레지라는 이름을

숙자, 영숙, 명자 누나라

개명한다

 

태평양 건너 어딘가에 피어 있을 수많은 그녀들이 나는 그립다

해질 무렵 집집의 담장이 지친 해바라기들을 동생처럼 업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온 것 같아 창 밖 내다본다

이제 갓 입학하는 어린아이들이 꽃잎을 가슴에 달고 꽃밭으로 등교 중이다

 

그녀들은 나를 찾지 못하는 술래들이다

나는 날마다 꽃잎 글썽이며 식물도감을 펼쳐들고 그녀들을 찾는다

조금 더디게 피어도 한 계절 화사한 꽃들의 일기를

지나가는 소슬바람이 내 창에 매일 찾아와 옮겨 적는다

 

쪽진 반닫이 창문을 펼치면,

이 세상의 페이지마다 꽃잎들의 사연이 적혀있다

꽃잎 뚝뚝 떨어뜨리는 꽃들을 바라보면, 이제 곧 헤어져야 하는 꽃들처럼 슬프다

서울시 식물도감 구 엘레지 동 12페이지에서 나는 그녀들과 상봉한다

 

봄 한철 지나가는 아픔들이 그녀들을

활짝 꽃 피웠던 것이다

 

계간 <서시> / 2007년 가을호

 

 


 

 

추종욱 시인 / 우드스탁을 추억함

 

 

우드스탁까지 관통하는 30도씨의 더운 열기가 지글지글 타오르는 오후

한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짐 모리슨의 배경 음악 속으로 걸어간다.

그녀는 황량한 마음을 다져 그 속에 방을 만들어 이 방 저 방 돌아다닌다.

음악 속의 그녀는 키위새 한 마리를 키우고 있거나

어둠에 달구어진 청춘에 쓰디쓴 술잔을 찾아 생을 들이키는 우드스탁을 추억하거나

오후, 붉고 파란 조명등 사이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쳐다보는 등 뒤의 한 사내의 애정을 배반하면서

쓴맛에 취해 그의 바지 위에 묽은 토사물을 내뱉어 비극에 관통당한 청춘을 묻어버린 것을 추억한다.

마리화나의 연기에 취한 듯한 삶의 비틀거림을 폭파할 것만 같은 기타 연주의 부비트랩

이미 끝나버린 것 같은 세월을 날려버린 부비트랩의 영혼에 깊숙이 박혀 빠져나오지 못한다.

엄마! 하고 불렀을 때 음악 속의 그녀는 부비트랩의 연주에 투항한 사람들과 함께

무거운 코트를 벗어 던져버리듯 가벼운 삶을 살아가고 싶은 부비트랩 같은 우드스탁을 추억한다.

 

 


 

 

추종욱 시인 / 페르마의 마지막정리

- 할머니

 

 

 날짜 지난 달력을 한 장 넘긴다 그녀가 셈은 할 줄 몰라도 달력을 더듬더듬 읽으며 숫자가 무한대라는 것은 안다 간혹, 생의 좌표 값을 구하는 법칙을 정한다 그만 살았으면 싶은 푸념들의 암호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살면서 구하지 못한 오래된 육신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던 수식들은 그녀의 지나가는 생의 공식들이다 그녀가 보름! 하고 떠올리면 십오일간의 숫자들이 어느새 달력 속으로 모여들어와 그녀를 기다린다 달력의 틈 사이, 세월을 낚아 낸 손가락은 힘이 부치는 듯. 만지고 본다 잊어먹지 마라, 암호화된 구십육 숫자들이 닿고 있을 생은 곧 자폭해버리는 X값이다 그녀의 달력은 마지막 정리를 하는 페르마의 노트다 그녀가 무수히 캐낸 숫자들의 푸념 섞인 유언의 수식이 언젠가 해독될지 모를 암호의 신호로 내게 보내온다

 

계간문예<다층>2008년 겨울호. 젊은 시인7인선

 

 


 

 

추종욱 시인

2007년 계간 《서시》 2007년 하반기 신인상에 〈보르헤스의 숲에는 푸른 숲이 있을까?〉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난시 동인, 시산맥 회원, 서시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