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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일 시인 / 파도
이제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땅 끝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무수한 생명들을 본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가슴이 아프기도 하겠지만 한번쯤은 저렇게 부서지고 싶다 큰 바다에서 달려와 지금 바위를 넘지 못 하고 돌아가는 한 무리의 돌고래 때들아. 푸른 등지느러미 위에 내가 타고 앉을 수만 있다면 발 붙인 이 언덕을 떠나 저 피안에 떠도는 한 줄기 물안개가 되고도 남으련만 다달을 수 없는 황혼 무렵 나는 다만 아름답게 채색되고 있다 서서히 부서지며 더 아상 바랄 것 없는 하얀 물거품 꿈을 꾸고 있다.
- 하재일의 아름다운 그늘 중에서-
하재일 시인 / 소금창고
나는 아직 쓰러지지 않아 바람의 부드러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 밤마다 내 머리에 내리는 무수한 별들의 오줌 줄기에 차가운 이마를 닦고도 결코 늙지 않아 갯벌에서 날아와 내 심장에 박힌 나문재 단단한 풀씨에도 난 몸이 갈라지지 않아 비가 새고 늘 한쪽으로 기운 나의 생애여 뿌리가 간혹 심하게 흔들리도록 따가운 햇살이 찌른대도
난 잔뜩 무표정하지 헐겁고 엉성한 내 몸 나무판자 안으로 정말 깊은 어둠이 밀물로 밀물로 스민다 해도 난 정말 외롭지 않아 맨발로 水車를 밟아 돌리던 힘든 추억이 녹슨 양철지붕처럼 붉게 서럽다 해도 그 많던 소금이 날아오른 날들의 환희를 온몸으로 꿈꾸며 시원한 솔바람을 마실 거야 하늘이 흐리고 세상이 온통 저문 날 늘 쓰러지지 않는 낡은 몸으로 시간 속에 남아 언제나 푸르게 살아갈 거야
하재일 시인 / 신의 사자(使者)들
사나흘 굶다 한끼만 먹어보자. 외진 산밭에 내려앉은 기러기떼.
흰 눈 사이로 잠깐 귀 열고 올라서는 싹들이 어여쁘다. 서릿발 깨고 뿌리째 뽑아 엄동에 보리싹을 먹어보자. 대륙을 건너온 관절을 잠시 접고서 앉는다.
그때 수상한 볏짚이 나타난다.
입맛 나는 벼이삭 줄기를 찾은 기러기떼. 이삭이 나타나자 눈보라는 새떼의 의심을 지우려고 몰아친다. 조각도로 어둠을 베어내어 나락 사이에 화약을 쟁인 다음 촛농을 떨어뜨려 접착하면 소년은 고기를 얻을 수 있을까. 논에서 개흙을 퍼다 미끼에 바르며 북방에서 온 한겨울 진객을 속이는 일이야말로, 영장류가 도처에 숨겨놓은 함정인 것을.
폭설이 들이닥친 설경 한 페이지. 도래솔 근처 솔가리에 묻혀 있던 깃털이 반짝인다. '그날 너희들 중 하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해마다 산천에 봄이 오면 춘란으로 피었다.'
광목천 펼치고 가는 한줄기 새떼. 경계 없는 나라 스키타이로 가는 신의 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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