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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종국 시인 / 네가 그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3.

채종국 시인 / 네가 그린

 

 

사이프러스 나무 옆에서 정령을 보았어

네가 숨겨 놓은 걸 찾으라 할 때

난 입술을 닫고 있었지만

보리밭과 태양 그리고 달의 그림자까지

푸른 죽음이 덮고 있는 걸 보았어

 

이제서야 말하지만 지난번 그린

강가의 푸른 별들에서도 같은 걸 보았어

뜨거운 것들 안에는 생명이 살고 있다는데

굳은 물감을 한 겹 더 뜯었을 땐 죽음이 잉태되어 있었어

절정의 그림 속에 네가 보았던 유령들이

그림을 지키고 있었어

 

어쩌면 지금도 사이프러스나무가

네 곁을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어

타오르는 저 나무를 보며

언젠가 우리 모두 네가 그린 나무 옆에

이글거리는 저 푸른 죽음을 보게 될지도 몰라

정령으로 되살아날지도 몰라

 

네가 있던 병원

사이프러스 나무 옆에 모종 하나 심고 돌아왔어

너의 그 해바라기 말이야

 

 


 

 

채종국 시인 / 붉은 장미

 

 

봄이면 엄마에게서 배운 슬픔이

칼 맞은 것처럼 길가에 낭자하다

타고난 슬픔이 켜는 우울한 변주는

내가 자라난 골목에서 눈물을 키웠다

하찮은 것들에게조차 눈을 떼지 못하는 나는

봄날, 겨울처럼 울고 있는 소녀의 등을 본다

 

엄마의 생각이 줄기를 타고 오르는지

계절은 병든 몸을 빨아 붉은 핏덩이를 피워낸다

해가 갈수록 장미가 붉다

엄마가 피를 토한 후 더욱 그렇다

짙어지는 선지 꽃송이 따라가면

내게로 이어진 붉은 샘을 찾을 수도 있겠다

 

장미를 보는 순간 거짓말이 하고 싶어졌다

문득 내가 가정법 속에서 살아온 건 아닌지

만약 내가 그녀의 자궁에서 숨 쉬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녀가 가시 돋친 담장에 자라지 않았더라면

 

잎이 시든 봄날의 장미는 더욱 붉다

병실 창 밖

고개 내민 엄마의 얼굴이 붉다

 

 


 

 

채종국 시인

1970년 광주에서 출생. 2019년《시와 경계》를 통해 등단. 2016년 신라문학대상 수상(시조).  현재 대중서사연대 회원. 시와 의미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