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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주병률 시인 / 이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3.

주병률 시인 / 이별

 

 

  겨울 벚나무 아래서 이별을 했다.

  그 남자 너무 오래 서서 울었다.

  강둑에 기댄 마른 갈대의 아랫도리는 붉고

  강물은 덤벙덤벙 깊이를 알 수 없이 흘러갔다.

  흘러가면서 그것들은 서로 얼음이 되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얼음의 흐느낌도 마저 듣지 못하고

  밤은 이미 너무 깊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나무 가지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사람의 마을로 가는 길은 모두 모래가 되었다.

 

 


 

 

주병률 시인 / 고염나무

 

 

  고염나무 마른 잎이

  내 집이다.

  마른 잎에 난 구멍

  구멍 속의 상처가

  내 집이다.

  바람만 불어도 말라서

  더 이상 마를 것이 없는

  잎

  구멍

  구멍 속의

  바람이 내 집이다.

  내 집은 밑이 없다.

  밑이 없어서 흔들리고

  흔들려서 더 흔들리고

  흔들려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우체부도

  새들도

  거미도

  흔들려서 그 집엔

  아무도 세들어 살지 않는다.

  죽은 자들의 영혼도 머물지 않고

  묘지 위에서도 자라지 않는

  바람의 집

  고염나무 마른 잎이

  내 집이다.

 

 


 

 

주병률 시인 / 간다는 것

 

 

  간다는 것은

  아주 멀리 간다는 것

  다시 돌아온다는 것

 

  뒷목에 까슬거리며 달라붙은

  먼지도 탈탈 털어 버리고

  가방도 버리고

  구두도 버린다는 것

 

  오전 10시에 죄다 닫혀버린

  대문과 창문을

  대낮에 남아서 빈둥거리는 먼지와 햇볕을

  버리고

  잊는다는 것

 

  간다는 것은

  아주 멀리 간다는 것

  다시 돌아온다는 것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서

  분별도 없이 웃자란 자신을

  비워간다는 것

 

  서른 지나 마흔을

  삿된 마음을

  버린다는 것

 

  길이 없는 밤에도

  타박타박 말없이

  또 하나 길이 된다는 것

 

 


 

 

주병률 시인 / 너무 늦은 시간

 

 

  용서하게

  겨울 하늘을 무연(憮緣)히 휘날리는 하얀 눈들을 용서하게

  사랑을 읽고 더 잃을 것 없이 가난해져서 너에게 전화를 하는 나도 용서하게

  고군산 열도를 지나

  심포 앞바다를 지나

  망해사 500년 느티나무를 지나

  낡은 포장마차 안 과수댁이 쳐주는 소주잔으로 앉아서

  힘이 든다고, 힘이 든다고 말하는 이 미친 겨울바람도 용서하게

  살다보면 때로는 저렇게 굽은 느티나무 등걸 위에 손을 올려놓고도

  가끔씩 서로가 따뜻해지는 날이 있다고

  대낮부터 불콰하게 젖어서 눈밭에 붉게 갈대로 눕는 과수댁도 용서하게

  십 년을 혼자 모질게 버티고도 아직 굽은 마음이 있어서

  검게 갯벌로 흐르는 저 진눈깨비 같은 눈물도 용서하게

  만경(灣景)이 만경(晩景)으로 맺혀서 불덩어리로 눕던 바다

  나는 아직 그 바다의 만경(晩景)을 마저 건너지 못하고

  작은 등 하나 기댈 곳 없이 사락거리며 눈이 내리는 저녁

  굽은 등으로 누워서 잠들 수 없었던 밤도 용서하게

  갈 곳도 없이 헤메던 너의 지난밤도 다 용서하게

  고군산 열도를 지나

  심포앞 바다를 지나

  망해사 500년 느티나무를 지나

  사랑을 잃고 더 잃을 것 없이 가난해져서

  아직도 무연(憮緣)히 휘날리며 붉은 눈발이 되어 내리는 나에게

  너무 늦게 도착하던 시간도 용서하게

  짧은 유서도 끝내지 못하고

  사랑한 마음을 용서하게

  이 추운 겨울을 용서하게

 

 


 

 

주병률 시인 / 빙어

 

 

  달밤이었다.

  화톳불이 타고 있었다.

  겨울 무덤 주위에선 가랑잎 한 장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검게 숯이 되고

  세상의 모든 시간들이 당나귀처럼 어둔 산맥을 넘어갔다.

  얼음이 벤 돌들이 오래도록 강물 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어디선가 쩔렁거리며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사람 하나 없이 저문 산맥을 넘어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가닿지 못했던 시간의 뼈

  그 냉기의 뼈를 바르며 빙어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내 건너지 못한 언 강물을 거스르며

  자신들의 생애에 대해, 시간에 대해, 죽음에 대해 골똘해져 있었다.

  더는 외롭지 않을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한 방울의 눈물로 밤을 지새기도 했다.

  세상 어디서나 꽃은 피고 꽃은 졌다.

  달밤이었다.

  강물 속에선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데 한 무더기의 억새가 흔들리고 있었다.*

  발목이 가는 빙어의 옆구리가 물살에 흔들릴 때마다

  달빛은 얼음 속에서 하얗게 깊어갔다.

 

*김춘수,「뭉크의 두 폭의 그림」중에서

 

 


 

 

주병률 시인

1960년 경주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어문학과 졸업. 1992년 월간 《현대시》에〈오후의 잠〉외 5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빙어』(천년의시작, 2006)가 있음. 현재 도서출판 <생각과표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