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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률 시인 / 이별
겨울 벚나무 아래서 이별을 했다. 그 남자 너무 오래 서서 울었다. 강둑에 기댄 마른 갈대의 아랫도리는 붉고 강물은 덤벙덤벙 깊이를 알 수 없이 흘러갔다. 흘러가면서 그것들은 서로 얼음이 되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얼음의 흐느낌도 마저 듣지 못하고 밤은 이미 너무 깊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나무 가지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사람의 마을로 가는 길은 모두 모래가 되었다.
주병률 시인 / 고염나무
고염나무 마른 잎이 내 집이다. 마른 잎에 난 구멍 구멍 속의 상처가 내 집이다. 바람만 불어도 말라서 더 이상 마를 것이 없는 잎 구멍 구멍 속의 바람이 내 집이다. 내 집은 밑이 없다. 밑이 없어서 흔들리고 흔들려서 더 흔들리고 흔들려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우체부도 새들도 거미도 흔들려서 그 집엔 아무도 세들어 살지 않는다. 죽은 자들의 영혼도 머물지 않고 묘지 위에서도 자라지 않는 바람의 집 고염나무 마른 잎이 내 집이다.
주병률 시인 / 간다는 것
간다는 것은 아주 멀리 간다는 것 다시 돌아온다는 것
뒷목에 까슬거리며 달라붙은 먼지도 탈탈 털어 버리고 가방도 버리고 구두도 버린다는 것
오전 10시에 죄다 닫혀버린 대문과 창문을 대낮에 남아서 빈둥거리는 먼지와 햇볕을 버리고 잊는다는 것
간다는 것은 아주 멀리 간다는 것 다시 돌아온다는 것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서 분별도 없이 웃자란 자신을 비워간다는 것
서른 지나 마흔을 삿된 마음을 버린다는 것
길이 없는 밤에도 타박타박 말없이 또 하나 길이 된다는 것
주병률 시인 / 너무 늦은 시간
용서하게 겨울 하늘을 무연(憮緣)히 휘날리는 하얀 눈들을 용서하게 사랑을 읽고 더 잃을 것 없이 가난해져서 너에게 전화를 하는 나도 용서하게 고군산 열도를 지나 심포 앞바다를 지나 망해사 500년 느티나무를 지나 낡은 포장마차 안 과수댁이 쳐주는 소주잔으로 앉아서 힘이 든다고, 힘이 든다고 말하는 이 미친 겨울바람도 용서하게 살다보면 때로는 저렇게 굽은 느티나무 등걸 위에 손을 올려놓고도 가끔씩 서로가 따뜻해지는 날이 있다고 대낮부터 불콰하게 젖어서 눈밭에 붉게 갈대로 눕는 과수댁도 용서하게 십 년을 혼자 모질게 버티고도 아직 굽은 마음이 있어서 검게 갯벌로 흐르는 저 진눈깨비 같은 눈물도 용서하게 만경(灣景)이 만경(晩景)으로 맺혀서 불덩어리로 눕던 바다 나는 아직 그 바다의 만경(晩景)을 마저 건너지 못하고 작은 등 하나 기댈 곳 없이 사락거리며 눈이 내리는 저녁 굽은 등으로 누워서 잠들 수 없었던 밤도 용서하게 갈 곳도 없이 헤메던 너의 지난밤도 다 용서하게 고군산 열도를 지나 심포앞 바다를 지나 망해사 500년 느티나무를 지나 사랑을 잃고 더 잃을 것 없이 가난해져서 아직도 무연(憮緣)히 휘날리며 붉은 눈발이 되어 내리는 나에게 너무 늦게 도착하던 시간도 용서하게 짧은 유서도 끝내지 못하고 사랑한 마음을 용서하게 이 추운 겨울을 용서하게
주병률 시인 / 빙어
달밤이었다. 화톳불이 타고 있었다. 겨울 무덤 주위에선 가랑잎 한 장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검게 숯이 되고 세상의 모든 시간들이 당나귀처럼 어둔 산맥을 넘어갔다. 얼음이 벤 돌들이 오래도록 강물 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어디선가 쩔렁거리며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사람 하나 없이 저문 산맥을 넘어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가닿지 못했던 시간의 뼈 그 냉기의 뼈를 바르며 빙어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내 건너지 못한 언 강물을 거스르며 자신들의 생애에 대해, 시간에 대해, 죽음에 대해 골똘해져 있었다. 더는 외롭지 않을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한 방울의 눈물로 밤을 지새기도 했다. 세상 어디서나 꽃은 피고 꽃은 졌다. 달밤이었다. 강물 속에선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데 한 무더기의 억새가 흔들리고 있었다.* 발목이 가는 빙어의 옆구리가 물살에 흔들릴 때마다 달빛은 얼음 속에서 하얗게 깊어갔다.
*김춘수,「뭉크의 두 폭의 그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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