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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나 시인 / 사랑의 힘점
머리에 천을 뒤집어쓰고 두 남녀가 키스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을 보았다 연인에게 조차 각자 마음 한켠을 들키지 않으려는 보자기 속의 사랑, 보여지는 것이 다 진실은 아녔다 입술 밖의 문장은 토막글로 진작 흩어져 버렸다 사랑의 각도에 따라 페달에 밟는 힘이 다름을 몰랐다 언덕길에 접어들면 더 세게 페달을 밟아야 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의 절반 세상의 절반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사원 같은 말들 진실의 꽃봉오리가 다문다문 피어나도록
생의 오르막길에서 페달을 밟으며 찾던 나의 힘점,
전생처럼 세상이 나를 지나가고 있다
한이나 시인 / 물의자
물고기 허공을 뛰어오르는 오후 세시의 꽃핌이다
산골짝 개울 물의자에 앉아 푸른빛 절벽 너머 흰 구름을 데불고 놀다가 온몸 적시며 다슬기 줍는 천진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의자가 된 나를 읽다가
물 위에 아로새긴 빛살무늬를 따라 흘러간다
마음아 너무 멀리 떠내려가지 마라
어색함을 걸쳐 입은 물의자의 한나절 호사가 싫지 않다
속내를 감춘 깜깜 속 너무 늦은 생애도 괜찮다, 삶은 지금 이 순간 피어나는 꽃봉오리인 것을
발 담군 의자에 깊숙이 묻은 몸이 동동 떠내려 간다
한이나 시인 / 겨울비
슬픔이 빗방울처럼 떨어지고 있다
중절모에 검은 정장 코트 모두 다른 얼굴의 묵묵한 남자들
혼자서 여럿이서, 지붕 위에 비가 내린다
살아가는 서러움과 쓸쓸함이 남자를 흠뻑 적시며 공중에 멈춰 있게 한다 땅으로 내려오지 않고, 들려진 그는 공중부양된 커다란 돌덩이다
생의 무게가 안쓰럽게 비에 젖어 오늘 더 어깨가 무거운, 슬픔이 알몸을 드러낸 한 남자
밖에서, 종일, 비 맞고 서 있다
그 옆, 나도 함께 비 젖는다
한이나 시인 / 너라는 귀신고래
고래를 찾아 무작정 떠난 적 있다
정말 고래를 만 날 수 있을까, 멀리 가까이 파도를 뒤적이는 눈길들이 매섭다
하늘과 바다의 파란빛에 들어있는 저 흰빛 순결과 공포의 색 모든 색의 시작이며 끝인 색 죄없이 바다에 수장된 영혼의 그림자
내가 꿰뚫어 보아야 할 것은 파도의 벽이다
포경선을 타고 망망대해, 내가 찾아 나선 것은 귀신고래 물 위로 딱 한 번 솟아올랐다가 깜쪽같이 사라진 너라는 붙잡히지 않는 미래다 포경선에 포획된 것은 빈 투망에 걸린 은빛 물살 한 조각,
아득한 손님 같은 너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
한이나 시인 / 저, 푸른꽃
초록에 어둑살 깔리는 서하리 산꼭대기 흰 바람개비 옆에 영원처럼 섰다
푸른 빛의 키 작은 꽃 육십만 평 너른 산비탈을 가득 채운 푸른꽃
가까이 다가가면 모습이 변해 더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너는 푸른꽃, 가까이서는 볼 수 없는 다가가면 멀어지고 마는 시간의 꽃
먼 생 숨은 사랑 같다
모든 것을 잊고 이랑마다 흙 속에 심어져 저 전심전력, 마침내 꿈속 푸른꽃을 밭뙈기마다 생의 애환으로 채울 겹겹의 속살들 고랭지 비탈에 피어난, 시간이 멈춘 사랑,
숨 쉬는 잎과 잎 사이, 배추 흰 나비 애벌레의 말이 있다 바람개비가 돌리는 밭둑 돌멩이의 온기 꿈속에서 완성된 너,
푸른꽃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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