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현아 시인 / 바디 페인팅
루이 아라공은 여자를 컬러물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문을 닫고 혼자 앉아있는 이 방안만 해도, 물론 색깔이 있었지만, 그렇지만 이건 누가 봐도 초벌그림일 겁니다 그런데 순간 누군가 조심성없이 열어제낀 문소리에 어디선가 소리 한 덩이가 날아와 덜컥 뱃속에 떨어집니다 얼마나 무겁고 또 뜨겁던지 눈앞 가득 빨갛고 파란 소리가 넘쳐났습니다 너무 놀라 그토록 조심성없이 철문을 열어제낀 게 대체 누군지 고개를 돌려 미처 확인하지도 책망하지도 못했습니다 소리는 점점 커지며 얼굴 가까이로 올라왔습니다 가까워지는 동안 내 얼굴은 아마,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변검공연을 하는 연기자처럼 아홉 가지 색으로 변하고 또 변했을 것입니다 초벌그림 속에는 아마도 물감덩어리 그녀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쿵 하고 문이 닫힐 때야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봅니다 햇살은 색색으로 변하는 내 얼굴을 담고 있는 팔레트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건, 내 몸에 그려진 유화그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현아 시인 / 클푸른빛이 감도는
눈을 감은 트럼펫 연주자가 양 볼을 부풀렸을 때 소리는 부푼 볼 안에 있었다 (잉크빛 심연이 목젖에 걸려) 연주자가 팽팽하게 부풀린 볼은 다소 푸른빛을 띠었고 소리들은 푸르게 부푼 볼 안에서, 벌써 무성영화처럼 연주되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처럼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멜로디는 검푸른 빛으로 리듬은 음영으로 들썩이고 순간 치켜 뜬 연주자의 검은 눈동자는 화성이었다 (아니 그보단 모드와 음계, 그 사이로 숨어버린 한 여자를) 금속 마우스피스가 연주자의 두툼한 입술로 다가오고 있다 소리는 아직 터질 듯한 볼 안에 있었다 (끝까지 돌려 감은 전자기타 줄처럼 위태롭지만) 그 긴장의 시간을 지켜보는 관중들은 탄력 있는 가죽 쿠션에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가 어려운 듯했다 (춤추게 해 줘요 제발) 연주자가 키스하듯 입술을 내밀어 트럼펫에 다가가자 (그때,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무대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은, 마침내 그 팽팽한 긴장을
터트렸다
나는 연주자를 감싸고도는 저 푸른빛을 바라본다
지현아 시인 / 엄마의 탄생
오늘 나는 만나는 것마다 붙잡고 내 아가를 낳아다오, 봄이 나에게 탄생처럼 아침을 열어 보이고, 내 아가를 낳아다오, 목련은 배냇저고리처럼 흰 꽃잎을 떨어뜨리는데, 내 아가를 다오, 하늘이 까르르 햇살을, 내 아가를, 구름은 잠투정 섞인 빗방울을, 내 아가를 낳아다오, 달빛이 나를 꼭 닮은 그림자 하나 누인다, 내 아가, 밤은 말랑말랑 살결로 안겨 오고, 내 아가를 다오, 잠은 옹알이 같은 꿈을 선물하는데, 그래서 오늘부터 나는 엄마, 자궁이 없는, 하지만 어디에나 아가가 있는.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이나 시인 / 사랑의 힘점 외 4편 (0) | 2021.08.03 |
|---|---|
| 주병률 시인 / 이별 외 4편 (0) | 2021.08.03 |
| 채종국 시인 / 네가 그린 외 1편 (0) | 2021.08.03 |
| 최광임 시인 / 달팽이 간다 (0) | 2021.08.03 |
| 하재일 시인 / 파도 외 2편 (0) | 2021.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