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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지현아 시인 / 바디 페인팅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3.

지현아 시인 / 바디 페인팅

 

 

루이 아라공은 여자를 컬러물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문을 닫고 혼자 앉아있는 이 방안만 해도,

물론 색깔이 있었지만,

그렇지만 이건 누가 봐도 초벌그림일 겁니다

그런데 순간 누군가 조심성없이 열어제낀 문소리에

어디선가 소리 한 덩이가 날아와 덜컥 뱃속에 떨어집니다

얼마나 무겁고 또 뜨겁던지

눈앞 가득 빨갛고 파란 소리가 넘쳐났습니다

너무 놀라

그토록 조심성없이 철문을 열어제낀 게 대체 누군지

고개를 돌려 미처 확인하지도 책망하지도 못했습니다

소리는 점점 커지며 얼굴 가까이로 올라왔습니다

가까워지는 동안 내 얼굴은 아마,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변검공연을 하는 연기자처럼

아홉 가지 색으로 변하고 또 변했을 것입니다

초벌그림 속에는 아마도 물감덩어리 그녀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쿵 하고 문이 닫힐 때야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봅니다

햇살은 색색으로 변하는 내 얼굴을 담고 있는 팔레트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건, 내 몸에 그려진

유화그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현아 시인 / 클푸른빛이 감도는

 

 

눈을 감은 트럼펫 연주자가 양 볼을 부풀렸을 때

소리는 부푼 볼 안에 있었다

(잉크빛 심연이 목젖에 걸려)

연주자가 팽팽하게 부풀린

볼은 다소 푸른빛을 띠었고

소리들은 푸르게 부푼 볼 안에서, 벌써

무성영화처럼 연주되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처럼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멜로디는 검푸른 빛으로 리듬은 음영으로 들썩이고

순간 치켜 뜬 연주자의 검은 눈동자는 화성이었다

(아니 그보단 모드와 음계, 그 사이로 숨어버린 한 여자를)

금속 마우스피스가 연주자의 두툼한 입술로 다가오고 있다

소리는 아직 터질 듯한 볼 안에 있었다

(끝까지 돌려 감은 전자기타 줄처럼 위태롭지만)

그 긴장의 시간을 지켜보는 관중들은

탄력 있는 가죽 쿠션에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가 어려운 듯했다

(춤추게 해 줘요 제발)

연주자가 키스하듯 입술을 내밀어 트럼펫에 다가가자

(그때,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무대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은, 마침내 그 팽팽한 긴장을

 

터트렸다

 

나는 연주자를 감싸고도는 저 푸른빛을

바라본다

 

 


 

 

지현아 시인 / 엄마의 탄생

 

 

오늘 나는 만나는 것마다 붙잡고 내 아가를 낳아다오, 봄이 나에게 탄생처럼 아침을 열어 보이고, 내 아가를 낳아다오, 목련은 배냇저고리처럼 흰 꽃잎을 떨어뜨리는데, 내 아가를 다오, 하늘이 까르르 햇살을, 내 아가를, 구름은 잠투정 섞인 빗방울을, 내 아가를 낳아다오, 달빛이 나를 꼭 닮은 그림자 하나 누인다, 내 아가, 밤은 말랑말랑 살결로 안겨 오고, 내 아가를 다오, 잠은 옹알이 같은 꿈을 선물하는데, 그래서 오늘부터 나는 엄마, 자궁이 없는, 하지만 어디에나 아가가 있는.

 

 


 

지현아 시인

2011년 《문학과 창작》을 통해 등단.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