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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시인 / 쌍둥이
아픔과 슬픔처럼 닮아서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상현달과 하현달은 어둠의 방향이 다른데도 엄마는 매번 똑같은 옷을 두 벌 샀다
그럴 바에야 그림자를 입고 다닐 거예요, 그때부터 우린 서로 달라지는 게 지상의 목표가 되었다
동생이 폭식을 즐기면 나는 거식이 즐거웠다
동생이 심장에 불을 가져다놓으면 나는 배꼽에 얼음을 채워놓았다
참다못한 엄마는 우리를 사진관에 데려가 하나의 액자 속에 나란히 앉혀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고 빛이 둘을 묶어놓는 동안 나는 몰래 한쪽 눈을 감았다
너는 도대체가 말을 듣지 않는구나, 엄마가 나의 감은 눈을 칼로 긁어낼 때
일란성 아픔과 슬픔 사이에 불구의 형제가 하나 더 태어났다
길상호 시인 / 새똥
시간이 고여 흐르지 않는 오후였다
유리창에 굳어 있는 새똥을 닦아내다가 이미 죽은 새 우는 소리를 들었다
새는 공기주머니를 뒤적여 쓸쓸하고 씁쓸한 울음만 꺼내놓았다
골목 가장자리 씀바귀가 꽃잎을 닫고 씨앗 만드는 일을 서둘렀다
고여 있던 시간이 조금씩 증발하고
이름 대신 날개를 단 사람이 창가에 다가와 입김을 불어대는 것인지 유리가 뿌예졌다가 다시 투명해졌다
똥을 닦아낸 휴지는 죽은 새처럼 나의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날개를 갖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잠시 떠돌다 갔다
길상호 시인 / 따순 밥
언 손금을 열고 들어갔던 집 그녀는 가슴을 헤쳐 명치 한가운데 묻어놓았던 공깃밥을 꺼냈다 눈에서 막 떠낸 물 한 사발도 나란히 상 위에 놓아주었다 모락모락 따뜻한 심장의 박동 밥알을 씹을 때마다
손금 가지에는 어느 새 새순이 돋아났다 물맛은 조금 짜고 비릿했지만 갈증의 뿌리까지 흠뻑 적셔주었다 살면서 따순 밥이 그리워지면 언제고 다시 찾아오라는 그녀의 집은 고봉으로 잔디가 덮여 있다
길상호 시인 / 빗방울 사진
연꽃의 조리개가 닫히고 나면 사진관은 곧 사라질 거라 했다
못도 물그림자를 걷어내며 암실 같은 어둠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손님을 위해 사진사는 잎 끄트머리 빗방울 렌즈를 갈아 끼우고
꽃받침도 없이 겨우 꽃잎을 붙잡고 있는 인연,
바람만 조금 불어도 초점거리에서 벗어나 버리는 얼굴
그가 빗방울에 맺힌 그림자를 꺼내 연잎 위에서 굴리는 동안
현상되지 않던 표정들은 잎맥 사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떨어뜨린 연, 꽃잎을 받아들고 어두워진 수면이 한참을 울먹였다
길상호 시인 / 눈치
눈치는 보일 듯 말 듯 아주 작은 물고기 나는 배꼽이고 항문이고 눈에 띄지 않는 곳마다 눈치를 풀어 키웠다 물고기는 배고픈 내게 밥을 물어다주었고 때로 감쪽같이 숨는 법도 알려주었다 눈치 때문에 가까스로 불행을 벗어나는 일이 많았다 눈치를 보며, 눈치를 따라가는 게 익숙해질 무렵 나는 서서히 살이 올랐다 그러면서 몸속의 작은 물고기는 한 마리씩 죽어나갔다 하나같이 배가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다 눈치에겐 불안이 유일한 먹이였던 것, 나에게서 풍기기 시작한 비린내를 눈치채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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