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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겨리 시인 / 물의 후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1.

김겨리 시인 /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바람이 통통해지는 무렵 나무가 그늘을 방생하는 것은

그늘의 이소離巢

그늘은 때가 되면 나무를 떠나지만 증표로 나이테를 남긴다

 

그늘이 성근 것은 계절이 빠져나간 흔적이다

적멸을 횡단하는 경로에서 나무가 비병을 지르지 않는 건

그늘이 나무의 공전을 멈출 때 울음도 자전을 멈추기 때문이다

 

나무는 상처 난 그늘을 다시 촘촘하게 여밀 터지만

나무가 그늘을 수숩하는 건

자신의 부고를 담담하게 진술하는 수행이다

 

일설에는 그늘은 나무의 다비라는데,

 

아무도 나무를 관통할 수는 없다

나무가 짊어진 그늘이 생애를 다 해독할 때까지

 

앙상한 그늘을 덮고 벌레들이 쉼표처럼 잠들어 있다

그늘 밖으로 빠져나온 맨발을 달빛이 슬쩍 밀어 넣는다

달빛의 인기척에 놀라 나무가 지느러미를 퍼덕거릴 때

그늘이 우수수 쏟아지고 나무의 쇄골이 드러난다

 

초록의 씨줄과 날줄로 한 땀 한 땀 공들여 지은 수의壽衣

생애가 오체투지인 나무의 텅 빈 폐허에서

새들이 아직 이소하지 못한 몇 조각의 그늘을 포란하고 있다

 

 


 

 

김겨리 시인 / 물의 후렴

 

 

수면에 비친 구름의 목덜미에 물결 자국이 흥건하다

수심이 깊을수록 푸른 것은

물의 심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굽이친다는 말은 단층의 은유인 물결이 생긴다는 뜻

물결이 이는 것은 수심이 떨리기 때문이다

소금쟁이가 그저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지만

가라안지 않으려 그들이 얼마나 숨을 참고 견디는지

그때 물의 괄약근은 또 얼마나 정교한 탄력을 유지해야 하는지

물결을 움켜쥔 소금쟁이의 발이 물빛인 것을 보면 안다

자신의 원형을 버려 가며 기꺼이 구겨짐을 견디는 것이

물의 굴절만은 아니겠지만

물에 결이 있는 것은 생의 굴곡에 대한 물의 습작

퇴고에 퇴고를 거쳐도 늘 물의 초고에 머문다

구름 소인이 찍힌 물결은 수심이 첨삭한 추신이다

수압으로 봉인된 수심을 풀면

익사체의 목록은 가라앉고 소문만 물결체로 뜨겠지만

온새미로 인양된 수심의 궤적은 늘 젖어 있어서

물결체를 읽으려고 바람이 온갖 자세로 수면을 들여다본다

잠자리가 꽁지로 수면을 두드릴 때 잠깐씩 열리는 물의 문

잠자리는 물의 경첩,

물을 속독하듯 물수제비가 저수지를 건너간다

 

 


 

김겨리 시인(본명: 김학중)

1962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졸업. 2015년 《농민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분홍잠』(시산맥, 2016)이 있음.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2017년 제8회 김만중문학상 수상. 제16회 웅진문학상 .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