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경 시인 / 소와 뻐꾹새 소리와 엄지발가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3.

이경 시인 / 소와 뻐꾹새 소리와 엄지발가락

 

 

등가죽이 툭 꺼진 소가

빵빵하게 배를 채우는 그 시간 동안

정강이가 시린 아이 하나

산새처럼 앉아 있지 오도마니

무릎을 감싸안고 내려다보고 있지

 

고무신 뚫고 나온 하얀 발가락

빈 뱃속 가득 뻐꾹새 울어

하늘 명치끝에 숨이 닿게 울어

지친 해도 꼬박 산을 넘는다

 

달개비 푸른 꽃으로 밤이 피어나

먼 산마을 오르는 저녁 연기를

우리 소는 되새김질로 휘휘 감아 삼키고

어머니 몸에선

언제나 생선 비린내가 났다

등록금 봉투에서도 났다

 

포마드 향내를 풍기는 선생님 책상 위에

어머니의 눅눅한 돈이 든 봉투를 올려 놓고

얼굴이 빨개져서 돌아왔다

 

밤늦게

녹초가 된 어머니 곁에 누우면

살아서 튀어 오르는 싱싱한 갯비린내가

우리 육남매

홑이불이 되어 덮였다

 

<시와 시학> 시 당선작.

 

 


 

 

이경 시인 / 바람소리

 

 

누가 이 밤에 흰 생 무를 썰고 있네

시간의 발자국 소리 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무쇠 식칼 시퍼런 날 아래 한 절벽이 잘려나가고

또 한 절벽이 하얗게 눕는다

지금처럼

그 때도 무서운 역병이 돌아

수상한 바람이 앞발톱을 세우고

어린 것들 이마 위를 어슬렁거리는 밤에

어머니는 무쇠 식칼로 생 무를 썰고

나는 연필심에 침을 묻혀 숙제를 했다

무엇에 놀라기라도 하듯

등잔불이 쿨럭이며 수염을 길게 그을면

우리는 긴 역사책 같은 바람 소리를 읽었네

어둠 속에서도 한 발 삐끗하는 법 없이

거두절미 단도직입

어머니 생 무 자르는 칼도마 소리에

바람도 문밖에서 기세가 꺾이고

병마도 발꿈치 들고 저만치 비켜 갔어라

병마도 발꿈치 들고 저만치 비켜 갔어라

 

 


 

이경 시인(본명 이경희)

경남 산청에서 츌생. 1993년 《시와 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시집으로 『소와 뻐국새소리와 엄지발가락』과 『흰소 고삐를 놓아라』, 『푸른 독』『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 등이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강사. 제5회 유심작품상 수상. 제19회 시와시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