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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남유정 시인 / 회화나무 무릎을 베고 누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4.

남유정 시인 / 회화나무 무릎을 베고 누워

 

 

늦은 봄날이

우듬지에 파란 물을 들이붓는다

나뭇가지가 살아난다

 

직박구리 몇 마리 날아와

부리를 문지르자

늦게 말문을 튼 아이처럼

나무도 수다스럽다

 

아이들이 돌아간 오후

빈 교실로 회화나무를 부른다

땀 흘린 아이들을 품어

기꺼이 품을 내어주던 넉넉함으로

녹색그늘이 따라온다

 

회화나무 그늘을 베고 눕는다

이 아늑함이 내 것이라니

정신없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직박구리들 사이 나뭇잎

푸릇한 숨으로 물들인다

 

 


 

 

남유정 시인 / 가을날, 그대를 생각한다

 

 

꽃들이 보이지 않는다

영 사라졌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시 오고야 말 몸짓이다

사랑도

내게서 내게로 숨어들었거니

나무들은

제 몸에 감춘 꽃을

미리 꺼내지 않으니

더딘 걸음으로

애태우며 오는 것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시간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니

저 먼 사막까지 마중하는 것이니

대추가 찬바람 속에서

마침내 붉어지듯

해금의 심장에서

자진모리로 우는 숨을 꺼내듯

견딜만큼 견딘 구름이

단숨에 쏟아져 내리듯

기어이 한바탕 춤이어도 좋다

 

 


 

 

남유정 시인 / 꽃이 돋는 까닭

 

 

내가 흔들리는 것은

 

당신을 향해

 

마음이 가지를 뻗으려 하기 때문

 

당신을 향해

 

그 단단한 거죽을 뚫고 나오려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

 

 


 

 

남유정 시인 / 단추

 

 

단추 하나가

툭 떨어진다

 

그 순간

인천구치소 찬 마룻바닥

빨갛게 언

너의 맨발에

떨어지던

한 방울의 눈물이

떠오른다

 

반짝이는 단추처럼

별이 빛나는 밤

고흐는 아를르의 밤하늘에서

거친 빛의 소용돌이를 읽고

별이 된다

떨어진 단추를 단다

반짝이는

우주에 매달린

 

 


 

남유정 시인

1999년《시와 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 『기차는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문학의전당, 2007)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