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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준옥 시인 / 필요한 사람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4.

노준옥 시인 / 필요한 사람

 

 

  나는 구름에 필요한 사람

  안개낀 거리에는 꼭 등장하지요

 

  나는 일기예보에 필요한 사람

  흐린 날은 허리에 밧줄을 메고 공중을 날아다녀요

 

  나는 1인용 식탁에 꼭 필요한 사람

  스파게티에 코를 처박고 핑킹가위를 찾아요

 

  나는 타이핑에 필요한 사람

  온라인 무료상담을 하고 1박2일 여행계획을 세워요

 

  나는 세계지도에 꼭 필요한 사람

  국경검문소 동쪽 통로에 기대어 패션쇼의 거울을 보지요

 

  나는 해독작용에 필요한 사람

  돌미나리 캐서 새끼양의 눈물을 닦아주지요

 

 


 

 

노준옥 시인 / 달 호텔

 

 

  내 꿈은 오백오십 살

  네 꿈은 육백육십 살

  오, 이제야 우리 제대로 만났군

  어디서 뭘 잃어버리고 왔나

  입술에 피가 묻었네

 

  드디어 알 거 같아 우리 관계의 시초를

  네가 왜 밤하늘을 보고 울부짖었는지

  얼음바닥에 승냥이로 내동댕이쳐졌는지

 

  우린 행복해져선 안 돼

  완성되어서도 안 돼

  오늘도 내일도 팔만 가지 체위를 죽도록 연습해야 해

 

  달 호텔로 가자 자장가를 불러줄게

  무서워 하지 마 네 꿈을 끝장내줄게

  넌 오백오십 살 난 육백육십 살

 

 


 

 

노준옥 시인 / 마스크

 

 

  오늘은 너를 모를께

  얼굴을 뒤집어봐

  눈빛은 제자리에 두고

  시간을 열어야지

  숨죽여 숨을 쉬어봐

  어느 나라로 가겠니

  바타비아로 같이 가주겠니

  뜨거운 거미가 되어보겠니

  난 너를 모르지

  알면 안되지

  애달픈 입술은 달콤한 포도즙

  손가락은 몹시 쓸쓸한 표정이야

  심장을 꺼내봐

  큰소리로 울어봐

  오늘은 너를 모를께

 

 


 

 

노준옥 시인 / 너에게 포도주를 금지한다

 

 

  온순한 뇌에는 장미를 심고

  노래를 불러 물고기를 잡을 때

 

  너에게 포도주를 금지한다

  상냥함을 금지한다

  식탁에 비스듬히 앉은 자세를 금지한다

  팔장을 끼는 것을 금지한다

  꽃장수 수마나의 여덟 꽃다발을 금지한다

  불안의 책을 금지한다

  둥근 침대를 금지한다

  너에게 풍차 무늬의 잠옷을 금지한다

  애욕을 금지한다

  아라비아 댄스를 금지한다

  치마에 묻은 젖은 얼룩을 금지한다

  랜턴을 금지한다

  아침 일곱시를 금지한다

 

  성가곡을 들으며 나비는 죽어가고

  무덤 속에도 목소리가 따라온다

 

 


 

 

노준옥 시인 / 침울하고 창백한 포도나무가 있는 장면

 

 

  나는 빵굽는 기계가 있어요

  3시간 15분이 걸린답니다

  나는 열심히 친구를 찾지않는답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그릴 뿐이지요

  박쥐와 지네와 무당벌레가 지나간 길을 찾아보지만

  사냥은 정말 싫어하지요

  장님 길잡이 노릇도 하지 않구요

  나에겐 썰매 끄는 고양이도 없어요

  누군가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꽃을 심고 그림을 그리네요

  교향곡도 작곡하고 신기하게 이쁜 아기도 낳고 기르는군요

  하지만 나에겐 침울하고 창백한 포도나무가 하나 있어요

  늘 점성술사를 곁에 두고 내가 볼 수 없는 것만 바라보지요

  한밤중에 잠을 깨도 한낮에 보듯 포도나무의 얼굴을 본답니다

  아무도 포도의 비밀을 참지 못하지만 포도라는 이름은 신선하지요

  포도나무도 자신을 알아선 안되지요

  나는 아무 일도 없고 아침에 일어나 빵을 구워요

 

 


 

노준옥 시인

부산에서 출생. 단국대 영문과 졸업, 2001년 《시와 사상》을 통해 <나는 그녀를 연구한다>로 등단. 현재 『시와 사상』 편집장. 시집으로 『모래의 밥상』(시와사상, 2011)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