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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원 시인 / 꽃들이 꺼지는 순간
툭 하고 꺼졌다 아버지는 캄캄한 방을 흔들어 촬촬 소리가 나면 불꽃이 수명이 다한 거라 했다
할머니에게 주려고 동백을 돌려 땄다 그때 퍽, 봄이 꺼졌다
알을 빻은 동백을 삼베주머니에 넣고 쥐어짜던 두 손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렀다 거센 물줄기만 끌어 올리던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길게 아래로 흘렀다
꽃은 전류를 타고 온다 돌려 딴 동백을 받은 적이 있다고 돌려 끼우면, 백열등은 공중에 매달린 꽃이 된다고 지금도 믿는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백열등을 돌려 방을 끈 적이 있다
떨어질 때 꽃술이 끊어지고 검은 머리카락이 풀렸다
꽃가지 하나를 꺾으면 몇 송이의 꽃들이 툭 하고 꺼지는 순간이 있다
려원 시인 / 곤드레나물
곤드레나물 한 접시와 양념간장이 놓여있다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어 올리자 데쳐진 잎들의 맥이 끊겨 있다
바람으로 휘날리다 죽어서야 숨을 죽이고 있다
간장을 넣고 비벼서 입에 넣자 입안의 향이 밥알들을 삼켰다
아들이 죽어 바람을 타고 걸어 다녔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대나무숲에 대병 소주를 들고 가서 곤드레만드레가 되어서야 나온 아버지
밥을 넘기자 아버지의 냄새가 식도를 타고 들어갔다 빈 대궁에 아버지의 삶처럼 휘청거렸을 잎사귀가 부드럽게 나를 감싸주었다
대 끊긴 선산에서 곤드레나물이 자랐다
(시집/ '꽃들이 꺼지는 순간' 에서
려원 시인 / 포상기태(胞狀奇胎)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 내게 의사는 올챙이 알 수정이라고 해요.
어릴 적 어느 봄길에서 목이 말라 논두렁 물을 마셨죠. 할머니한테 혼나고 혼나는 일은 꼬물꼬물 꼬리를 키워요. 개울가나 논에서 물을 함부로 마시지 말라던 할머니.
꼬리는 함부로 몸을 흔들어요.
개구리 알이 몸에 들어가면 아기 대신 개구리 알을 낳는다고 해요. 할머니가 태어난 작은 섬마을에는 개구리 알을 낳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해요.
아랫배를 뒤적거리는 의사, 태반만 보이고 아기가 보이지 않아요.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려요 몽글몽글하게 보이는 것이 포도송이 같아요. 아니 개구리 알이어요.
의사의 입속에는 붕대와 메스가 있어요. 포상기태입니다.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개구리 알 임신이에요.
꼬리는 다리 속으로 숨고 다리는 폴짝, 뜀박질 속으로 숨어요.
자궁 안이 아기 대신 작은 개구리 알들로 꽉 차 있어요. 무심결에 마신 꼬리가 다리 속으로 숨고 아기는 이미 물거품처럼 사라졌어요.
*포상기태 : 태반의 영양막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환.
려원 시인 / 무화과
무화과가 익을 무렵은 칭얼거리는 계절이에요. 그래서 무화과나무에서 젖 냄새가 나요 우린 젖꼭지 나무라고 불렀지요.
열매를 따자 꼭지에서 울음이 터졌어요. 끈적끈적한 우윳빛 액체가 방울방울 솟아요.
마루에 앉아 동생에게 젖을 물리던 엄마 생각이 나요 말랑말랑한 무화과를 부드럽게 한입 물었죠. 칭얼거리고 싶었죠.
열매 안에 숨은 꽃 달달함이 입안에서 뛰어놀고 있어요.
엄마 살 냄새라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모두 틈의 냄새들이에요. 틈틈이 틈을 먹고 자라서 과일 안을 붉은 꽃술이 꽉 채웠어요.
無花果라고요? 꽃을 따라왔다가 혼자 남겨지는 열매가 있다지만 끝까지 남아서 열매를 토닥거리는 꽃인걸요.
려원 시인 / 바지락 끓이는 여자
이혼서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여자는 바지락을 씻어요. 조개들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어요. 더 이상 밀물이 들지 않는 해안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요 결막염 걸린 눈은 수평선에 걸린 노을처럼 붉어요. 조바심이 서서히 끊어 오르기 시작해요 거품을 뱉어낸 조개들이 입을 벌리고 부글부글 소리를 내요 밸브를 잠그고 깨소금을 뿌려요 아뿔싸, 국물을 떠올린 숟가락에 가슴에서 부글부글 올라온 눈물이 뚝 떨어져요 손끝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뚝 뚝 바닥으로 이중 점프를 해요 짠물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내요 반지 자국은 조각칼로 파낸 판화처럼 약지 손가락에 깊게 새겨져 있어요. 어느 물때도 다 자국이 남아요. 그녀는 식탁에 앉아 조갯살을 발라내요 떨어지지 않는 살점은 찢어져요 방문을 열지 않는 아이처럼 열리지 않는 조개는 불안해요. 알맹이를 내놓은 껍질들을 땅에 버려요 식탁 위 이혼서류가 바지락 국물에 젖어가고 있어요. 썰물은 잘 찢어져요 해안선은 두 세계가 찢어진 곳이에요. 서류는 이미 만조로 깊고 외딴 섬처럼 서명란의 빈칸이 둥둥 떠다녀요.
려원 시인 / 달팽이
마을의 우물 속엔 파란 햇살이 들어있었다 이끼 낀 돌멩이 하나 느릿느릿 기어오르고 있었다.
우물의 수위(水位)를 갉아먹는 파란 털이 뒤덮인 연체동물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의 척도 가뭄과 메아리와 우물의 수원지(水源池)
돌멩이는 우물을 기어올라 우물 밖의 축축한 마을이 되려고 했다. 이끼 꽃이 피고 우리는 그 꽃을 달팽이의 눈이라 불렀다.
우물들은 모두 자웅동체(雌雄同體) 장마를 산란하기도 한다.
내 어릴 적 어느 날 달팽이는 기어이 우물 밖으로 기어 나오고 마른 바닥으로 고양이와 흐린 달이 빠졌다.
그리고 뼈만 남아있었다.
려원 시인 / 몽골리즘
* 겨울방학이 끝나고 고등학교 입시시험 삼 교시 나는 시험 감독을 위해 교실에 서 있었다. 책상에 앉아있는 아이가 쳐다보았다. 어리둥절한 지문(誌文)들이 찡그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넝쿨이 있고 넝쿨에서 계절도 없이 예쁜 꽃이 피고 토란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모두가 닮으려 모여든 얼굴, 붉고 작은 입술 사이에서 아이의 말이 새어 나왔다.
언니, 언니 꽃말이었다.
* 어느 토요일 오후 원통 터미널에서 혀를 입에 말아 넣기 벅찬 듯 조갯살처럼 밖으로 내민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중학생 덩치에 서 있는 갓난아이.
과자를 사 주었는데 종일 터미널만 맴돈다는 아이는 서울행 버스를 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인종과 상관없이 몽골인을 닮았다는 얼굴, 서양에서는 이 증세를 몽골리즘이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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