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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도훈 시인 / 서류가방과 이별하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4.

이도훈 시인 / 서류가방과 이별하다

 

 

비트겐슈타인과 쉼보르스카를 읽으려다

오랜 친구 샘소나이트를 떠나보냈다

언젠가 야수로 돌변한 가방이야기를 읽은 적은 있지만

그가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무한 회전하는 2호선 전철을 갈아타고 있을 때

한 손에 매달려 종일 따라다니고 있는

또 누군가의 시집을 바라보며

그에게도 잠깐이나마 쉴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

나도 잠깐 어디에 기댔으면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말 없는 내 친구도 좀 쉬게 하려던 때였다

 

원래 가방들은 내성적인 사각이라

묵묵히 한 줄의 이빨들을 열수도 있겠지만

수정하려고 인쇄해 놓은 궤양의 흔적을 보고

내가 시인인 줄 알려줄 테고

수첩 속 일과표는 내가 어디쯤 있을지 말해주겠지만

웬걸 이리 많이 먹어치웠냐고 타박도 하겠지만

 

낡고 허름한 겨울 같아서

곳곳에 하얀 가시가 도사리고 있고

만질 때마다 타다만 재가 묻어나 아무도

내 가방을 열어보지 않을 것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젯밤 시작노트를 꺼내 논 것이

다행일지 불행일지는 모르겠고

가끔 터진 실밥을 태우는

불 고문을 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더는 짐꾼 노릇을 안 해도 돼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선반 위에서나 분실물센터 창고에서

곰곰이 긴 시간을 취할 수 있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지만

뻣뻣한 손때가 손끝에서 너무 가볍고

떠나간 역할을 위해

몇 개의 손을 더 구입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이도훈 시인 / 너무도 사소한 별에서 산다

 

 

집으로 돌아가는 8차선 도로에

은하수가 흐른다

이 시간 지구는 발장단도 못 되는 발끝의 속도로

돌다 서다를 반복하고

지구의 어딘가에 있긴 있는 집과

이 막막한 정체의 거리는 또 얼마일까

모든 집들은 흐르는 중이고

흘러가는 집을 평생 따라다녀야 한다

멈출 수 없는 별이 더 밝게 달린다

내어준 꼬리를 밟고

더 긴 꼬리를 내어주는 이어달리기

모래였는지 바람의 차선이었는지

먼 길을 가는 끝없는 낙타행렬을 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자동차의 꽁무니에서 공전하는 별들

접촉사고로 부서진 별에서 두 사람이 내리고

견인차가 역주행으로 달려오고

창문을 내리고 물끄러미 구경하는

별의 운전자들

한 무리의 별이 고가를 오르고

또 다른 무리가 그 밑을 돌아나간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숨겨진 낙원이 있을까

너무도 사소한 별들에 끼여

어디로 가야 빠를까 갈림길에 선

급하게 끼어드는 별 하나

질서정연한 귀가와 출근의 은하수에 섞여

이탈하지 않는 한 점이 되기를 바라며

광속으로 전송되어온 문자 하나를 열고 있다

 

 


 

 

이도훈 시인 /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서기 2018년 인간 저항군의 리더 존 코너는 기계군단과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 중이다 빛을 잃어버린 시커먼 하늘과 거리는 포성과 화염뿐 어깨에 멘 총이 시름시름 처진다 온몸에서 검은 그을림이 새어나오고 발가락은 감각이 없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질 때 난 TV를 끄고 집을 나와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인류의 생존이 걸린 이 시점에

 

   거리는 깨끗하고 포성도 화염도 총을 멘 사람도 없다 나는 날아드는 서류를 피해 자리에 앉았다 책상은 살벌한 천연색 포스트잇이 점령한 지 이미 오래 빈틈을 찾아 몇 개를 더 붙였다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린 잔인한 일격이었다 밤늦게 쉬어 빠진 목을 비틀어 가래를 뱉는다 지쳐 곯아떨어진 가방을 끌고 차에 오른다 머리카락은 너덜너덜 진저리를 친다

 

   나는 인조인간이 분명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주머니 속 구겨진 영수증과 책상 위 고지서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통장의 잔액에서 뺄셈을 하며 나는 어떤 유형의 인조인간일까 생각한다 결국 이 뺄셈이 언젠가는 인류를 멸망시키겠지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다 가방 대신 총을 메고 파멸이 난무하는 어느 황폐한 도시에서 기계군단과 혈전을 벌여야 하는 날들에서 격렬한 하루를 뺀다

 

 


 

 

이도훈 시인 / 하루를 시작하는 명상

 

 

   기억은 잃어버린 다리처럼 저렸다 멍하게 앉아있는 이 명상은 어느 악몽의 뒤끝일까 문 밖에선 칼춤이 벌어졌다 춤사위에서 뛰쳐나온 칼날이 사방으로 박히며 그릇들을 들볶아댄다 칼날이 묻은 아침은 껄끄럽게 입안을 들쑤실 것이다

 

   옷을 추슬러 거실로 나온다 잠이 덜 깬 옷자락은 길게 미끄럼을 탔다 소파에 앉으면 싸늘하게 목덜미를 겨눈 시간의 칼날 얼른 목을 서둘지 않으면 싹둑 잘리리라 아침을 맴도는 입김은 짙은 안개가 되어 발목까지 쌓였다 안개는 부두를 숨기고 있었다

 

   출항을 준비하는 배는 출렁거렸다 부두를 떠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이다 선장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 중, 뱃머리에서 피운 담배 연기가 길게 침묵한다 그 끝자락에서 뛰어노는 햇살만이 해맑다 빡빡하게 조인 주머니 단추를 풀면 닳아빠진 수첩 하나가 기웃, 고개를 내민다

 

   수첩을 넘기기가 두렵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들, 오늘 해야 할 일들, 빼곡히 꽂힌 칼을 하나씩 뽑아본다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늘 낯설다 배 밑바닥에서 토해내는 헐벗은 엔진 소리를 장단으로 구두는 한동안 견딜 것이다 도로는 파도보다 빠르게 달려왔다 해탈한 듯 따라 웃는 하루가 시작된다

 

 


 

 

이도훈 시인 / 숨은그림찾기

 

 

사람들은 모른다

언제부터 저 구석들이 꾸역꾸역 살이 올랐는지

숨은 그림들이 구석을 먹어 치우는지

구석이 그림들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지

어색한 회색 다리 위에서

구름에 칼집을 내면 쏟아지는 빗줄기들

가느다란 꼬챙이를 하늘에 꽂으면

햇살이 줄줄 흘러내리고

그 햇살을 감고

가냘픈 희망이 칭칭 감긴다

먼 산을 뒤로하고 하얗고 파란 투명판을

옆구리에 끼워나가면 산은 지워지고

살진 구석들이 꿈틀거리며 그린 감청색 유화

얼룩덜룩 알록달록

보이기도 하고 가린 것도 같은

희멀건 투명판을 떼어내면

고가 위로 보였던 산마루

벌겋게 익은 하루를 삼켜버리고

저 몸속엔 해가 몇 개나 들어있을까

지워져 간 산등성은 누가 다시 그려줄까

숨은 그림 속 노을을

아이들은 기억할 수 있을까

 

가림 막에 그려진 풍경들에도 꽃피는 봄

그렇다면 곧 다가올 여름은 또 어떤 것들의 가림막일까

저 빌딩들은 노을은 화단들은

무엇들을 가리며 펼쳐져 있는 것일까

 

 


 

이도훈 시인

1971년 서울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과 졸업. 2015년 상반기 《시와표현》를 통해 등단. <시마> 발행인. 〈온새미로〉 동인. 화성문협 회원. 현 영재리더학원장. 시집 <맑은 날을 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