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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시인 / 숲 속의 키스
두 개의 목이 두 개의 기둥처럼 집과 공간을 만들 때 창문이 열리고 불꽃처럼 손이 화라락 날아오를 때 두 사람은 나무처럼 서 있고 나무는 사람들처럼 걷고, 빨리 걸을 때 두 개의 목이 기울어질 때 키스는 가볍고 가볍게 나뭇잎을 떠나는 물방울, 더 큰 물방울들이 숲의 냄새를 터뜨릴 때 두 개의 목이 서로의 얼굴을 바꿔 얹을 때 내 얼굴이 너의 목에서 돋아나왔을 때
김행숙 시인 / 그곳에 있다
신체는 깎아지른 듯 절벽이 되었어 기도하기 좋은 곳 자살하기에 더 좋은 곳에서 나의 신체는 멈추었다 나는 그리워했다 그리워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 절벽에 매달린 기분으로 너의 손을 잡았을까 그런 기분으로 너의 손을 놓칠 때 허공을 할퀴는 분홍 손톱들이 활짝 활짝 피어나는 곳에서 저녁의 꽃처럼 오므리는 곳에서
김행숙 시인 /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
빨강과 검정 사이에서 너의 머리카락은 매일매일 자랍니다. 눈이 가장 밝은 사람도 머리카락이 자라는 순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 머리카락은 한 달 후에 자라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에 대하여…… 너의 눈빛에 대하여…… 나의 마음에 대하여…… 어느 날 한 달 후에 알게 되는 것들. 나는 그럴 줄 몰랐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해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머리카락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습니다. 나는 너처럼 너는 나처럼 거울의 혼동이 가득한 곳. 세상의 모든 미용실은 기이합니다. 14세기에서 가위가 전승되는 곳에서 도구들은 발전의 발전을 하였습니다. 미용실에서 지구인이 외계인인 척하며 걸어나오고 외계인이 지구인인 척하며 걸어나와서…… 우리는 하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둘이다, 우리는 셋이다, 우리는 넷이다, 우리는 다섯이다. 그렇게 말해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침묵으로 돌아갔습니다. 각각의 침대에 누웠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라는가. 성기를 감추듯이 머리카락을 감춘 여인들이 사랑하고 슬퍼하고 투쟁하는 이야기를 밤새 읽었습니다. 아침이 밝자 소설의 문장처럼 나는 너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습니다. 나는 잘 못 읽었어요. 나는 잘 못 읽었어요. 나는 못 읽었어요. 어쨌든! 나는 읽었어요. 머리의 반쪽은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시간처럼 시간처럼 끝없이 자라는가. 왜 머리카락은 정치적인가. 마침내 누가 머리카락을 해석하는가
김행숙 시인 / 고양이
고양이가 되겠다고 집을 나온 첫날 밤부터 눈에서 빛이 났던 건 아니죠. 열세살 때부터 고독한 눈알을 원했는데요, 초점이 사라질 때까지 눈알을 빙빙 굴렸을 뿐이었죠 누가 좀 뻥, 차줬으면
포물선을 그리며 고양이 한 마리가 날아가는 거예요. 아, 그렇게 풀밭에 눕고 싶어요
밤은 길고 낮잠은 달콤해요. 그녀는 여섯 마리의 고양이 새끼를 배고 있어요. 그년느 나의 선생이었고, 연인이었죠. 안녕, 라라. 고양이의 길은 여러 갈래, 여섯마리의 고양이 새끼 같은 것. 안녕, 미미.
고양이가 되겠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 형은 정겹게 내 귀에 대고 말했죠. 넌 원래 고양이 새끼야. 네가 담요에서 나와 기어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붕 아래 쥐새끼들이 싹 없어졌다니깐.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려보라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형은 나의 전도사였죠.
형은 검은 양복을 입는 사기꾼이 되었구요. 나는 또다시 털갈이가 시작됐어요. 아. 그렇게 힘이 없고 부드러워요. 올겨울에는 나는 더 무성해지고 더 포근해질것 같아요.
이제 아주 멀리 고양이의 길을 가요. 고요한 새벽마다 울음 소리를 연습했답니다. 그건 고양이의 것이죠. 달빛처럼 바람소리처럼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영영 모를 거에요.
김행숙 시인 / 말라깽이 L의 식탐
늘 좋은 음식을 먹고 있어요. 음식과 헤어지지 않아요. 당신과 헤어졌어요.
당신은 내게 통닭을 사가지고 오는 존재였어요. 나는 웃는 해골이었는데, 아침마다 당신은 내게 물을 부어 마셨죠. 당신은 道人이 되었어요.
통닭이 날아가겠어요? 내가 먹은 통닭은 500마리, 백일기도를 드렸지만 살이 찌진 않았어요. 아, 통닭은 차례차례 날아갔군요. 항문을 막아야 했을까요?
지금은 여행 중이에요. 오리의 마을, 염소의 마을, 은갈치의 마을, 道를 물었어요. 道를 모르시니 음식점을 가르쳐 주세요. 음식점을 물었어요. 애석하게도 L의 집을 모르시니 道를 가르쳐 주세요.
음식은 그 고장의 색깔이고 향취랍니다. 오징어의 마을, 고추장의 마을, 감자의 마을, 흑돼지의 마을, 여행은 계속됩니다.
김행숙 시인 / 우는 아이
우는 애들을 달랠 순 없어요. 난 머릿속이 출렁거릴 때까지 울죠. 애들이 날 달래지 않으면 애들이……애들이……익사할지도 몰라요.
애들은 정말 겁도 없어요. 물속에서 노래를 해요. 엄마……엄마……엄마……저 뻐끔거리는 입들을 좀 보세요.
표면으로 올라온 물방울들이 잇달아 터지고 있어요. 공기가 가시처럼 찌르나 봐요. 애들이 너무 오래 물속에서 놀고 있어요.
김행숙 시인 / 번개에 대해
고백컨대, 내게서 뚝 떨어지는 곳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번개에 대해
번개 양편의 구름에 대해 나는 올려다 보는 자이다. 이때 내가 맞은 비의 굵기에 대해
잘 말할 수 없다 나는 편향된 자이기 때문이다. 번개에 대해
뚝 떨어진 곳에서 정전이 되기도 하지만 구름은 다치지 않는다. 구름은 구름의 규칙이 있다
나는 번개에 대해 수정하지 않겠다
김행숙 시인 / 대청소의 날들
가루비누 같은 눈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죠. 그런데 정말 오늘은 가루비누, 칠일을 내릴 듯이 내렸어요. 사람들의 입술에서 비눗물이 흘렀구요. 거품을 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니까요.
검은 동자는 핏물에 빠져 있어요. 오늘은 어쩌면 눈물로 뭔가를 씻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모두들 눈을 감길 무서워해요. 오늘은 분명 이변(이변)이어서 결심하기가 매우 두렵지요
배를 쥐고 구역질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목이 마구 꿈틀거렸어요. 멀리 있는 강이나 바다를 생각해 봤지만 가루비누, 참 아득하게 내렸죠. 우리가 순순에 대해 생각해야 했을까요? 우리는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어요.
가루비누, 칠일을 내리 듯이 퍼붓고 군인들이 마침내 물청소를 시작햇어요. 사람들은 얌전했지요. 그런데 더러운 강아지들이 사라지고 우리가 이윽고 발가락 벗은 기분이 들면, 거지와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세수하는 사람들을 구별할 수 없으면,
그때는 실종된 사람들도 보일까요? 우린 점점 유리처럼 투명해졌어요.
김행숙 시인 / 하이네 보석가게에서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 나는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너무 가벼워졌어. 마리오는 아름다운 남자야.
안녕.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야. 보석가게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감정하지. 가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는 건 멋진 일이야. 언니, 곧 부자가 될게. 라인 강가에서.
한국 남자를 사랑해보지 못했어. 오늘밤에도 언니는 시를 쓰고 있니? 언젠가는 언니 시를 읽고 감동하고 싶어. 안녕.
11월에 나는 마리오를 만나지.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마론인형을 훔치는 언니를 봤어. 눈물이 주르르 모래처럼 흘렀어.
언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모래는 가장 아름다운 흙의 형상이었지. 나는 매일 밤 기도를 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 나는 왜 쓸쓸해 지지 않았을까? 언니를 위해 기도할게. 안녕.
김행숙 시인 / 문은 안에서 잠근다
후려갈기듯이 그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을 때,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문은 반발하여 조금 열린 채 떨리고 있었다 그가 부르르 떨고 있는가?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나는 바닥을 드러낸 채 그의 침대에서 너무 오래 기생했다 두께 없는 얄팍한 사랑을 원고지 구기듯이 했네 나는 썼지만 구겨진 그를 펴서 다시 읽고 싶지 않았네 그는 때때로 아,벌어져 있었네 그의 침대에서 나를 핥고 지나가는 문장들을 나는 너무 쉽게 받아들었네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나는 뜨거워지지, 그러니 그가 없는 그의 침대에서 참을 수 없었네 오래 참으셨군, 나는 빈정거렸지만 내가 나쁘지 않은가? 문을 닫았다고 그는 믿지만 문의 반동은 그의 행위에서 비롯하니 이것이 내가 받은 교훈의 전부다
이제 내 낙서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다시 바람이 나침반인가? 자꾸 펄럭이니 문 밖의 풍경은 빠르게 늘어났다가 줄어들고 늘어.... 나는 중얼거린다, 문은 안에서 잠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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