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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양희 시인 / 가난한 시인의 노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8.

이양희 시인 / 가난한 시인의 노래

 

 

늙은 어부처럼 지혜로운 시인은

오래 깁고 기운 언어의 그물을 던져

새벽 바다에 펄떡이는 시어(詩語)를 풍성하게 거두어들인다

나는 변변한 그물도 마련하지 못한 채

해 돋는 바다에 반짝이는 언어(言語)떼를 욕심낸 적 있으나

솟구쳐 오르는 한 마리 금어(金語)를 꿈꾸기도 했으나

저녁 바다에 눈시울 붉어지는 노을이 흐르니

내 서툰 욕망으로 엮은 그물을 걷고

가난한 빈 배를 위해 바다가 펼치는

무욕의 그 노래를 따라 부르리라

 

 


 

 

이양희 시인 / 마침내

 

 

마침내 담쟁이덩굴은 벽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맨 처음에 한 잎의 어린 손을 내밀어

말을 걸었을 때

벽은 어느 때보다 높이 솟아올랐지만

덩굴손으로 기어오르는 아찔한 세월을 견디는 동안

벽은 깎아지른 마음을 한 칸씩 내어주더니

지난 밤 달빛 아래 꽃이 흔들릴 때

남은 마음을 마저 내어주고 뒤로 물러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벽은 더 이상 벽이 아니다

마주 선 벽에게 말을 건네며

걸어오는 벽에게 손을 흔들며

마침내 담쟁이덩굴의 마음을 얻었다

마침내 담쟁이덩굴이 되었다

 

ㅡ시집 『비스듬히 서 있는 당신』(효림, 2013)

 

 


 

이양희 시인

1958년 대구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철학과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철학과 졸업. 199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과향기가 만드는 길』(1996, 실천문학사), 『잘 익은 생각의 집』(2000, 여음출판),『비스듬히 서 있는 당신』(2013, 효림)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