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은창 시인 / 길눈이 어둡다
나는 유독 길눈이 어둡다 을지로에서 종각까지 택시를 탄 일도 있다 지인들이 내비게이션이라도 사서 다니라는 걸 여태 마음에만 두고 그럭저럭 살다보니 그것도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길을 잃을 배짱을 잃었기 때문이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젊기 때문이다 잃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다
이 지상에서 길을 가장 잘 아는 건 강이다 길을 모르면 강물에게 물어볼 일이다 하늘을 가장 잘 아는 건 구름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으면 구름에게나 물을 일이다
허튼짓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면 강이나 구름에게 길을 묻는다 비로소 갈 수 없는 길이 생긴다
양은창 시인 / 섬을 잃다
종일 남한강을 뒤져서 수석 한점을 얻었다 집에 돌아와 탁자 위에 두고 요모조모를 뜯어보니 자태가 꼭 외딴섬 같다 파도에 밀려나 안개 속에 묻힌 바위섬 가만가만 듣자니 갈매기가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수심을 등에 업고 잠이 든 것 같기도 하다
이러저런 행복한 고민에 빠져 돌을 뜯어보는 사이 초등학생 아들이 들어온다 자칭 돌을 좀 안다는 놈이다 너는 이게 뭐 같으냐 아빠 그건 똥섬이에요 주저 없이 던진 한마디 품평에 안개가 확 걷힌다 수많은 갈매기들 모두 날개를 접는다
언제부터인가 내 눈에는 콩깍지가 씌워졌다 흔히 시인이란 사물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자 그러나 돌을 돌로 보지 못하는 사시 언제나 뒤집어 보려고 한 죄만 주마등이다 침침한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한점 섬 가장 낮은 이름으로 불리는 똥섬
그 섬을 눈앞에서 잃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안희연 시인 / 면벽의 유령 외 5편 (0) | 2021.08.29 |
|---|---|
| 손음 시인 / 감자 외 5편 (0) | 2021.08.29 |
| 송희지 시인 / 영원한 가오리 외 1편 (0) | 2021.08.29 |
| 엄원태 시인 / 어느 가족 외 1편 (0) | 2021.08.29 |
| 여종하 시인 / 검(劍)의 노래 외 2편 (0) | 2021.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