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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음 시인 / 감자
감자를 삶는다 흐린 불빛 아래 감자를 먹는다 비가 내리고 누군가의 심장 같은 감자가 따뜻하다 일손을 놓고 휴식처럼 감자를 먹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빗소리를 들으며 젓가락으로 포크로 감자의 심장을 푹푹 찌르는 저녁이다 어릴 적 친구 미자 같은 만만한 감자, 나는 자주 감자를 먹는다 그때마다 비가 내렸다 냄비 속에 새알처럼 담겨진 감자는 순하고 말이 없다 비는 한 알 한 알 감자의 내부를 파고든다 내가 조용히 앓고 있던 슬픔이 저 혼자서 감자를 먹는다 감자는 나를 익히고 내리는 비를 가만히 듣는다 그때 내가 조금 미안했어하며 감자를 삶는다 비는 감자를 익힌다 노란 냄비가 모락모락 익어간다
저것은 감자가 아니다
손음 시인 / 새
나뭇가지의 몸은 왼쪽으로 휘어져 있다 그 가지에 친친 감긴 햇살은 내가 혁대로 삼아도 좋겠다
정오에는 새가 나무의 등짝을 파먹는다 아직도 *당신 등은 파먹을 게 많아 새의 부리가 빨갛다 자세히 보니 나무가 죽은 새를 안고 있다 너무 울어 눈알이 빠져나간 새의 몸에서 애틋한 시간의 냄새가 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뒤섞여 온다 콕 콕 콕...나를 점치는 소리 콕 콕 콕...나를 파먹는 소리
슬픔이 남아돈다 더럽고 낡은 의자에 놓인 화병이 쓰러진다 정원에는 코피처럼 빨갛고 이상한 꽃이 피었다
까마득한 꿈속에서 미친 듯이 날아가는 한 마리 새를 본다 나는 창의 안쪽에서 슬픔을 만드느라 한껏 늙어 있다
생각이 주전자처럼 들끊는다 겨우 불을 끈다
*박서영 시의 한 구절 변용
손음 시인 / 통영 트렁크
여관방 문을 여는데 수국이다 간밤 기억 속 탕탕 총성이 저렇게 부풀려진 꽃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총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올망졸망 비좁은 화단에 엉덩이를 까고 앉은 수국에게 누가 저 분홍을 바쳤나 누가 잉크를 쏟아부었나 여름의 입구에 쪼그리고 앉은 수국은 저 혼자 두근두근
어데로 갈까예? 저, 아무 데나 만 원어치만 달려주세요. 택시는 한 마리 생선처럼 헤엄쳐서 대교 근처 여관 앞에다 트렁크를 내던져버린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뛰어내리라 뛰어내리라 악마의 농담, 그때 검은 트렁크는 서른 부근
어디에도 은신처란 없는 것이다 어디를 떠나와도 마음이 따라다니니. 소주 몇 잔에도 뱃고동 소리 간간하다 수국이 혼자 젖는다 아무래도 저 수국의 머리는 무게의 천형을 받았구나 나도 쪼그리고 앉았는데 어쩌나 내 머리에도 천 개의 수국이 무겁게 피었어
어디로 가야 할까 저항이든 혁명이든 이 순간을 건너가 보자 한철 아름다움의 명을 받아 무게의 천형을 머리에 이고 가는 저 수국처럼 나는 내가 가진 생의 무게를 건너가야 하리
뽀글뽀글 수국 파마를 한 여자가 여관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다 검은 트렁크는 열려 있다
손음 시인 / 밥 묵고 오끼예
한적한 주택가에 슈퍼 하나가 있다 벚꽃나무 한 그루 남편처럼 서 있고 주인은 온데간데없다 ‘밥 묵고 오끼예’ 신문지 한 장 찢어 붙여 놓고 그녀는 꽃놀이라도 간 것일까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그녀의 식사는 길어지고 있다
‘밥 묵고 오끼예’ 봄날의 나물 같은 사투리가 그녀의 부재를 메우고 있다 나는 사이다 한 병 사러 왔다가 진성슈퍼 아줌마 그녀를 상상한다 파마머리일까, 뚱뚱할까, 날씬할까, 테이블 위 초록 콜라병에 벚꽃가지 하나 척, 꽂아 두고 사라진 그녀가 나는 궁금하다
‘밥 묵고 오끼예’ 어쩌면 미나리 같은, 냉이 같은, 씀바귀 같은 대사 한마디 날리고 봄나들이를 선택한 그녀의 외출은 길어지고 있다 나는 봄날의 그림자처럼 길어지고 있는 그녀의 식사를 오래 생각한다
손음 시인 / 맨드라미
맨드라미 트럼펫이 길게 울려 퍼진다 프라이팬처럼 달궈진 마당에 발을 덴 수탉이 뒤뚱거리며 마당을 빠져나간다 식구들은 평상에 앉아서 더위를 구워 먹는다
맨드라미가 여름을 길게 분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맨드라미가 길게 울려 퍼진다
붉은 살점 같은 맨드라미 활짝 피었다 붉은 고기가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 간다 식구들도 따라 지글지글 익어 간다
식구끼리 욕을 한다 고기보다 붉은 욕을 고기 굽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욕을 만든다
자, 자 그래 봤자 우리는 식구다 식구들이 기름진 입가를 엉엉 웃는다 그래 봤자 우리는 식구다 그래 봤자, 그래 봤자다
모르는 척 고기가 익어 간다 맨드라미가 식구들을 길게 분다
손음 시인 / 편의점 생각
편의점에는 편의한 생각이 있다 삼각김밥이 있고 19세 미만 술과 담배 금지가 있다 찐빵과 어묵이 있고 즉석 북엇국이 있고 즉석 미역국이 있다 로또복권이 있고 밤을 잊은 그대가 있고 아저씨 술 작작 드세요가 있다
편의점에서 한 살 더 먹는 소년이 있고 컵라면으로 슬픔을 때우는 인류가 있고 욕으로 김밥을 욱여넣는 이가 있다 배가 고파 달을 먹는 고양이가 있고 진열대 재고를 걱정하는 사장이 있다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없는 편의점의 날씨가 따로 있다
편의점으로 놀러 간다 화성에서 내려온 밤의 케이블카처럼 편의점이 환하게 빛난다 자다가 웃다가 울다가 온통 편의점으로 가득 찬 생각들이 밥 먹으러 간다 죽으러 간다 살러 간다 편의점의 삶이 계속된다 미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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