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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욱 시인 / 귀부인과 할머니
"형님!" 올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서오릉이었다. 서오릉은 멀었는데. 올케가 있었다. 건널목 건너에서. 올케는 손을 들고 형님. 입장료는 천원이야. 형님. 장희빈이 묻혀 있어. 사약을 받았대. 사약은 쓰대. 봉분의 잔디는 축축하다. 건널목 건너에서. 올케는 원피스를 입고.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올케의 짝은 무엇일까. "올케!" 나는 손을 흔들었다. 장갑을 낀 줄 알았는데. 할머니의 손이었다. 저요. 나는 할머니의 손을 들고. 풀독이 오른 할머니의 손을 들고 말이 아니었다. 서오릉이었다. 서오릉은 멀다. 전국은 맑고 어디는 비. 때때로 비. 북북서로 가면 된다. 올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신해욱 시인 / 목도리
머릿속에서 나쁜 냄새가 났다. 그렇지만 코를 막고 환기를 시키는 일은 너무 어려웠고 나는 분홍색과 주황색이 실과 머리카락이 구분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매일 목도리를 뜨기 시작했다. 대나무 바늘, 따뜻한 실, 나의 오른손, 왼손이 차분하게 움직이는 것을 어떤 날은 세 단 어떤 날은 일곱 단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생각이 멎을 때면 목도리는 사라지고 달라붙은 빗방울들이 떠다닌다. 모른 체를 하고 오른손, 왼손, 오늘도 맑음, 어제도 맑음, 그렇게 하면 생각과 생각을 잇는 것처럼 목도리는 조금씩 길고 나쁜 냄새가 심하지 않고
나는 고마웠다. 머리카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어깨가 넓어지고 목이 조금 길어졌다.
신해욱 시인 / 도랑에서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 김소월 〈개여울〉
이쪽을 등지고 검은 머리가 도랑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산발입니다.
죽은 생각을 물에 개어 경단을 빚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그랗고 작고 가차 없는 것들.
차갑고 말랑말랑하고 당돌한 것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피가루 콩가루 비듬가루 뇌하수체가루 녹두가루 알록달록한 고물이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 나눠 먹읍시다.
바람이 붑니다.
검은 머리는 뒤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검은 머리만 어깨 너머로 흘러내립니다. 이크, 몇 오라기가 경단에 섞였는지도 모릅니다.
쟁반을 몰래 내려놓고 머리를 땋아주는 일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검은 머리가 삼손의 백발이 될 때까지 백발마녀가 라푼젤로 환생할 때까지 그 다음엔 그 다음엔 꼭 나눠 먹읍시다.
어제의 네가 오늘을 차지하고 있어서 오늘의 나는 이렇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신해욱 시인 / 주사위 던지기
주사위 내부에는 반듯한 모서리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아, 이런 방에서 하녀로 일하며 정성스레 걸레질을 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어.
동생의 그릇은 너무 아름다워서 물밖에 담을 수가 없고
나의 사념은 산성액에 녹아 기포가 되어 올라오고
모서리는
모서리는
함부로 망가지는 법이 없지.
방수가 되기도 하지.
세상의 주사위들이 한꺼번에 던져지면 진짜 복소수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이야기를 잃은 사물들아, 그러니 근심을 접고 이리 와봐.
여기가 아주 좋아.
신해욱 시인 / 뮤트
입안이 이빨로 가득해서 나는 지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구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면 배가 고파질 텐데.
우유가 마시고 싶어질 텐데.
*
우유를 먹고 자란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지붕 위에 던진 젖니를 모아 차근차근 탑을 쌓아보면 어떨까.
바벨의 탑보다 높이.
더 높이.
*
그런 탑의 꼭대기에 까마득히 서서 젖니를 혀 밑에 숨긴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모르는 이야기에 닿으면 좋을 텐데.
내 목에는 묵음들이 가득 고여 있으니까.
묵음들 속에는 생각이 없으니까.
내가 놓친 소리들이 가청권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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