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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미경 시인 /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

고미경 시인 /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집

 

 

당신은 나의 하나뿐인 집이어서 세상의 누추한 노동을 견디고 내가 돌아가는 곳이지만 가슴 아픈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날은 화살을 맞고 피 흘리는 프리다 칼로의 사슴은 소리를 지르거나 울지도 못하고 가시울타리 속으로 파고들었지요

 

안아줄 수도 보내줄 수도 없는 가엾은 짐승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도 사랑이라면 내가 어쩌지 못하는 울울한 푸른 가시들도 사랑인 거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지요

 

오래 된 어느 부족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며 몸에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는다지만 몸에서 꽃을 피우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일, 이 생각 끝에선 꼭 내가 울게 됩니다

 

그런 날은 나를 찌르던 가시에서 둥글고 하얀 꽃잎들이 피어나곤 했습니다 아파도 웃고만 있는 꽃잎들은 어쩌자고 제 피를 걸러서 향기를 길어 올리는지……

 

하염없이 그 곁에 서 있으면 어느 겨울밤 함박눈송이들 도란거리는 기척에 깨어 마음에 호롱불을 내다걸던 때처럼 당신은 지상에서 가장 아늑한 집이 되었습니다

 

 


 

 

고미경 시인 / 칸딘스키가 있는 식탁

 

 

늦밤으로 기울어지는 저녁식사,

냉장고는 드르렁 코를 골고

찬장의 그릇들은 다락방 소꿉놀이 중

숟가락통은 혀짤배기로 투덜대고

오래된 궁둥이 냄새가 배인 의자는 까무룩

형광등의 금속성 불빛 속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식탁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는 그림

한 점

 

루즈 블루의 첼로가 접시 위로 흘러내리면

"고기가 덜 익었나 봐요"

네모난 접시에 살짝 익힌 토마토

올리브 오일은 몇 방울 대롱대롱

여러 개의 삼각형을 포개놓은 접시에는

사과를 잘게 썰어 마요네즈로 버무린 샐러드

둥근 접시에는 간장으로 무친 가지나물

늦밤을 헤집는 젓가락이 식탁을 속삭인다

 

오물거릴수록 밤은 부드럽고

첼로의 선율을 타고

식탁을 횡단하는 밤비 소리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뻗어가면

"블라디보스톡으로 흘러들고 싶은 때가 있었지요"

창밖으로 어둠과 불빛이 섞인 파도가

높게 일렁거리는 바다를 건넌다

 

 


 

 

고미경 시인 /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

 

 

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처럼 봄비가 오네.

목을 빼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야윈 나무가 끝내는 눈시울 뜨거워져

몸마다 붉은 꽃망울 웅얼웅얼 터지네.

나무의 몸과 봄비의 몸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깊은 포옹을 풀지 못하네.

어린순들의 연초록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세상은 부드러워져갔네.

 

숨가쁘게 달려만 가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리.

가슴 안쪽에 간이역 하나

세우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군가의 봄비가 되지 못하리.

 

 


 

고미경 시인

1964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인질』(문학의전당, 2008) 『칸트의 우산』이 있음.  현재 '시비'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