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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길 시인 / 몰운대
1. 절벽 정자에 닭 볏 같은 현판 몰운대
이런 뼝대에서는 나뭇잎만 떨어지지는 않겠지 연심戀心도 떨어뜨리고 분심忿心도 떨어뜨리고 소란스런 세파를 털어내기엔 이만한 장소도 드물거니와 맹동萌動 지나 성하盛夏 지나 만추晩秋에 오면 숲나이 바위나이 다붓하니 눈도 호사다
심지만 앙상한 고추끈 같은 난간에서 저 계곡 아래 물밑을 끄심바리 해본들 낫질 지나간 옥수수 그루터기에 심장 긁히는 소리 버석 거린다
아직 멀었군!
2. 아낙들이 한 코씩 얽힌 소이연 팔장도 끼고 고사목에 손 집고 꽃처럼 피었다가 사진 찍고 되돌아나간다 물수제비 지나간 자리처럼 고요하다
이런 절벽에서 발끝과 뒤꿈치의 진행방향에 대한 유혹이 없다면 굳이 벼랑 끝에 설 이유도 없겠지만 없다없다 덧없음처럼 없는 덧보다 없음이 없어 그리하여 또다시 와야 할 몰운대
구름처럼 사뿐히 무게를 덜고 어느 날 고사목에 눈꽃으로 참 가볍게 필 때를 기다리며
낙화? 아직 멀었군!
강병길 시인 / 망우산(忘憂山)에서
작은 숲길을 오르면 마음이 물빛처럼 맑아진다 한강에서 불어온 바람이 용마산 능선을 타고 내려와 커다란 나무 잎사귀들을 흔들고 지나가면 두 눈이 초록빛으로 물들고 가슴 속이 바람처럼 서늘해진다
작은 숲길을 오르면 나무들 사이로 끊임없이 나타나는 묘지들 어떤 이는 커다랗게 비석이 있고 어떤 이는 작은 묘비명도 없지만 묘비명이야 있든 없든 이 세상 떠나가면 그만이라고 그러니 근심 걱정 털어버리라고 바람결에 모두 날려버리라고 망초꽃 무리들이 하얗게 손을 흔든다
강병길 시인 / 목욕탕을 훔쳐보다
고단한 날개를 세차하듯 참새 무리가 모래목욕 하는 저녁 제 몸집만한 구덩이에 들어가 흙거품을 날린다 부산하나 나름대로 질서 있게 순서를 기다리고 망을 보고 공중목욕탕이 단체손님을 맞아 호황이다
하루를 살며 묻혀온 육두문자나 송곳 같은 사설 따위 털어버리고 똥 한번 찍 갈기고 집으로 간다
연장에 쓰레기까지 차에 실은 나는 빈손으로 집에 못가는 한 집의 가장 수심 근심마저 털며 몸 말리던 참새들이 목욕 끝내고 돌아간 궤적은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의 숲에 닿았다
- 강병길 시집 <도배일기> 2011
강병길 시인 / 더듬이
태아의 부푼 손가락을 육구(肉球)라 불렀으나 오래전 더듬이를 모르고 쓴 말이다 모든 방향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구체임을 가장 여린 손끝으로 이어받은 일, 일생 진화의 역사는 수많은 더듬이의 실착과 오류를 용케 벗어난 더듬이들의 이어짐이다
사람의 일이 손끝에서 비롯된다면 마음과 가장 가까운 곳은 손가락이다 갑자기 어두워졌을 때, 갑자기 시력을 상실했을 때, 손으로 더듬어 출구를 찾는 행동은 마음의 내력을 말해준다 와중에 동족을 만나 손잡는 행동을 악수라고 부른다 몸으로 전해진 오래된 습관이다
패착을 모르는 신과 같은 더듬이는 찾을 수 없고, 오묘한 비껴감을 눈치 챈 더듬이는 더러 있었고, 가능한 몸을 보전하려는 더듬이라면 진퇴를 가리며 산다
태초의 더듬이가 둥근 이유는 먼저 나고 사라진 더듬이들이 모난 부분을 이미 깎아놓았기 때문이다
《문학의오늘》2018 가을호
강병길 시인 / 겨우살이-그리하여 11
한식 나흘 지난 날 백담사 야광나무에 겨우살이 한 줄기 경내 안의 울안의 기생 홀로 푸르다 삭발의 머리보다 시퍼렇다
가끔은 발품 팔며 유배 가듯 일주문 문지방 넘어 밤에 빛내는 꽃나무 찾아 수심교를 건너는 겨우살이들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어가 공 안의 정공도 우려먹으면 피가 돌고 머리가 맑아지는 피안이 되는가
흰꽃 무심히 피거나 말거나 첩첩산중 가벼이 마음 붙여놓고 통통하게 살 오른 잎 눈에 넣으며
그리하여 겨우 살아가는 일 밝혀보고 싶은 것인가
강병길 시인 / 변검(變臉)-그리하여 20
소금쟁이 지나간 동심원이 사라지듯 통증 없는 연극은 지나간다 냉엄한 순계의 나이테가 찰나로 벗겨진다
얼음산에서 얼음을 잘라 내려오는 얼굴 빗물에 씻기는 불두佛頭에 갓을 씌운 얼굴 주저앉아 아이의 봉분을 덮는 어미의 얼굴 사랑의 맹세를 두고 간 얼굴 제 그림자를 갖지 않는 강에 몸을 던진 얼굴 흙을 파던 삽을 물려준 얼굴 뻘에서 뻘에 박힌 돌이 된 얼굴 산수를 즐기려다 풍경이 된 얼굴 사막에서 낙타의 등에 소금을 싣는 얼굴 얼굴의 상처에 주름진 얼굴들이 어깨를 잇대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험적 경험들을 색깔로 나누거나 뇌두의 잠령을 헤아려보는 나도 매순간 얼굴이 바뀌는 편이다 앉았던 의자에 온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떠밀려 나오는 극장
강병길 시인 / 검(臉)-그러나 20
나는 극장에 간 일이 없다 다만 사물의 위치와 각도가 달라졌다 조금 전 일어났던 변형을 잠시 기억하며 일 초에 팔 십리 태양을 돌아가는 속도를 겨우 유추했을 뿐
별자리처럼 자리 잡은 검버섯이 얼굴에 새긴 우주의 지도인 지도 모른다 순간과 수유와 찰나 사이에 밤에 올려다 본 천계가 들어앉았다
얼에 골을 새긴 것이 얼굴이고 표정을 읽기란 불가해하다 관객석은 무대보다 늘 어두웠다
그러나 가없음에 방점도 찍고 지워지지 않는 세수를 하며 우주의 거울을 들여다본다 물주머니의 감내(堪耐)에 유성들이 들어와 박힌다.
강병길 시인 / 변(變)-하지만 20
앉을 곳 없는 참새들이 눈밭에 별처럼 떨어지는 마을 내 고향 이름은 설성이다 산정의 봉수대는 좋은 놀이터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파편들로 사방치기도 하고 참나무를 다듬어 검술을 흉내 내기도 하였다 어디든 극장이었고 봉화를 올렸다 불티가 유성이 되고 하늘이 은막이었다
등고선을 가늠하고 빛으로 점을 지우는 걸 알았을 때 나의 얼굴은 어두운편이었으나 이변은 없었다 묻어야 할 것은 묻고 고향을 나왔다
하지만 하굣길에 먹기 위해 등굣길에 묻어 놓은 고구마를 찾아 가끔 그 언덕을 서성거린다 전파연구소 위성접시가 별의 울음을 그러모으고 별자리들이 박힌 군부대가 점령한 그곳은 다시 성이 되었다.
강병길 시인 / 생선가게
생선가게 얼음 위에 소금 뿌린다 잘 녹지 않게
아스팔트 위에 소금 뿌린다 눈 잘 녹게
비린내 나는 사람 왔다 가면 소금 뿌린다 마음 얼지 않게
한 세상 왔다 간 사람 위에 눈물 흘린다 소금 녹여서
그리하여 북극 빙하 위에 소금 뿌리자 소금물 넘치지 않게
간 못 맞춘 비린 눈 위에 소금 한 주먹 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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