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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이화 시인 / 거울 속의 이방인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

권이화 시인 / 거울 속의 이방인

 

 

거울, 하나하나 밝혀지는 거울 속 얼굴

 

새가 되어가는 얼굴을 고민한다

고민에 고민을 더해 더 많이 거울을 본다

거울은 모두 자기 손아귀에 있다는 듯 겁 없이 얼굴의 전부를 까발리며 당당하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놀라지 않고 해골을 비추면서도 죽지 않는

저 거울 속 얼굴의,

 

고민이 해무 일으키고

해무가 불러들이는 눈사태와 눈사태가 몰고 오는 흰 칼날 위의 봄빛

봄빛에 앉은 휘파람새 날개

 

날갯짓에 놀라 튀어나가는 정오의 총소리

그 모든 신호와 기호와 가호가 더욱 고민을 키운다

 

고민이 없는 내 겨드랑이만 간지러움을 종소리같이 퍼트린다

 

거울, 새가 떠나버린 빈 거울 속 새를 본다

 

 


 

 

권이화 시인 / 오늘도 파랑새는 태어난다

 

 

무대 위에서 파랑파랑 어깨를 팔랑거리며

곧 쓰러질 힘으로 버틴다고 당신이 울 때 파랑새는 태어난다

 

파랑파랑 노래를 부른다

 

당신이 걸었던 해변을 따라 걷는다

울음을 결박하던 웃음과 웃음으로 치환된 질풍노도가 파도친다

 

모래가 될 때까지 나를 걷고 또 걸으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해변이 무너져 내리고 눈이 짓무른 채 나를 바라보는 석양

 

거기 낯선 해변에서 한 번도 별을 쥐어본 적 없어 보이는

어머니, 늦은 노래를 불러주세요

 

파랑파랑 노래를 불러 줄게요

 

파랑이 팔랑거리며 날개를 만들고 날아오른다

우리들의 파랑은 하늘을 덮는다

 

 


 

 

권이화 시인 / 밤, 몽상가의 일기

 

 

귀가 밝은 아버지 옆에서 죽은 바다를 생각하다가

꽃의 휘파람 소리 붉은 물고기가 밤을 따라가는 소리

눈으로 듣는다

 

기적이 울리고 밤이 오고

기차는 빠르게 꽃의 마을을 빠져나간다

그런 날이면 눈발은 산책자처럼 밤을 스쳐가고

목동은 먼 곳에서 잠든다

 

귀가 밝은 아버지 옆에서 귀를 열어야 할까

꽃의 플랫폼에서 얼어가던 구름 술잔 속으로 날아왔던 미지의 새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똑 똑 누가 내 귀를 두드리는 소리

붉은 물고기를 데리고 눈이 아름다운 방랑자가 찾아왔을까

마을을 지키는 붉은꼬리쥐뱀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소리일까

내 귀를 물고 늘어지는 꽃의 휘파람소리일까

 

아침이 오기 전 죽은 바다를 위한 파반느를 쓴다는 건

기적을 울리는 일이지만

 

흰 상자를 짜는 귀가 밝은 아버지 옆에서

방랑자의 노래는 얼마나 오래 써졌던가

눈발은 산책자처럼 스쳐가도 상자에 담길 노래는 오래 남는다

미지의 새가 구름을 베고 상자 속에서 잠들어간다

캄캄한 하늘에 귀를 열어 놓은 채

 

 


 

 

권이화 시인 / 잠들지 못하는 새는 그 새를 죽인다

 

 

잠을 넘어 아이가 쫒아온다

 

아이를 알아보는 새 잠들지 못하는 새

새 한 마리 위로 솟구친다 아이는 새를 쫒아 뛰어오른다

높이 나는 새

날아서 날아서 사라지는 새

 

새가 날아간다 큰 시계 밖으로

새가 끝까지 날아간다

 

아이가 사라진다

 

잠의 안에서 잠의 밖에서

잠이 밀려온다 아무도 살지 않는

잠이 밀려온다

 

 


 

 

권이화 시인 / 개양귀비가 있는 유화

 

 

화개장터 모퉁이를 돌아 한나절 소진하는 사이

붉은 손톱의 시간은 사라져버리고

 

저승사자 같은 제비나비가 노을을 끌어오는 저기는 여길까

 

흰 꽃들이 먹물을 뿌리네

너는 갈 길 바쁜 시든 장미일 뿐인데 사막여우가 사는

달빛을 댕겨본다

 

달빛에 흔들리며 춤판을 벌이는 개양귀비들

 

들썩이는 목덜미에 꽃비 내리는 아득한 저

빗속 사이사이에서 아직도 발이 자라나

붉은 새들 다 헤지 못한 유성들 내 발등으로 날아온다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이들은 안녕할까

 

새와 유성이 가는 아득한 곳으로 가자

꽃비 만나면 꽃비를 태우고 사막여우 만나면 사막여우를 태워

하얀 먹물이 들 때까지, 그러나

노을이 더 내리기 전

 

어두운 말들이 돌아오는 화개장터 출구에서

한껏 몸을 틀어 올리는 초로의 춤꾼들

어느 스타의 명작인 듯

 

개양귀비 흩뿌려진 한 폭의 유화를 그대에게 드린다

 

<시와 사상 17년 봄호>

 

 


 

 

권이화 시인 / 여행

 

 

팔레스트리나를 들으며 장례미사가 끝났을 때

천사의 신발과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기대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새들은 백지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까, 그때

유성이 떨어지는 행간으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을 맞으러 나간 새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고요한 새벽길을 달려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는

기도처럼 아름답고

 

나는 마리아도 없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작은언니는 어디까지 갔을까

 

 


 

 

권이화 시인 / 추상화

 

 

노을처럼 번지고 싶은 새 한 마리 바다로 가고 있다

 

소통하지 못한 소리가 피를 토해내며 선을 긋고 지나간다

각혈은 그런 것 풀리지 않는 강열한 직선

오금저리는 외침으로

저녁바다가 춤추고 있는데

 

불협화음으로 막힌 막대로 노를 젓던 디오니소스가

리히터*의 원색을 풀고 있다 비장한 청색은 뱀의 붉은

혓바닥처럼 날카롭던 직선에 풍덩 뛰어든다

바람에 떨어진 사선 하나 경계를 접고 노랗게 풀어지고

난무하던 선들이 각자의 소리를 한곳으로 모아

약간은 불안하지만 빨갛게 뭉치다가

디오니소스가 지나간 자리로 서서히 번져간다

번짐은 그런 것 불통의 강렬한 선들의 살풀이가

검은 바다를 취한 듯 통과하는 것이다

 

새는 혈색 푸른 태양의 파장 속으로 힘차게 날아가고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 독일 출신의 현대미술가.

 

 


 

 

권이화 시인 / 아메리카에 가본 적 없는 내가

 

 

드보르작의 아메리카를 듣는 밤

신세계적 흙냄새 빠르게 블랙커피에 오른 아메리카

드보르작이 첼로를 켜는 옆에서

곁불을 쬔다

 

묵직한 첼로는 점차적으로 고음의 기적을 울리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메리카로 질주한다

체코에서 태어나 나뭇잎처럼 날아온 그

아메리카 속살 헤집다가 보았다는 신세계를 향해

백년도 더 된 아메리카 열차를 몰고

늑대울음 아리 아리랑 넘는 밤을 횡단하며

동굴을 지나간다

 

아메리카가 궁금하다

그곳에는 십삼 월에 앵두가 익고 석류꽃 벙그는지

공작새 공작나비 타고 꽃구경 오는지

첼로 끝에 반짝이는 철로를 본다

저 길 끝에서 뉴요커와 나란히 아메리카식으로 걸으며

아메리카식으로 휘파람 불며

아메리카식으로 포옹하고 싶어진다

 

아메리카에 가본 적 없는 내가 아메리카를 듣는 밤

그 거대한 중심으로 눈발이 모여든다

저렇게 눈발에 푹 잠들었다 깨어날 때

아메리카는 필시 신세계적일 거라고

나는 아메리카 쪽으로 머리를 눕히고

아메리카를 향해 잠들고 싶다

 

아메리카에 가본 적 없는 내가 아메리카를 듣는 밤

 

-시인정신 2014년 겨울호

 

 


 

권이화 시인(본명: 권오성)

1961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4년 『미네르바』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어둠을 밀면서 오래 달리기>. 제12회 동서문학상. 현 미네르바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