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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숙 시인 / 헛잠
땅속에서 수십 년을 묵었으나 수맥이 씻고 씻은 죽음은 썩지 못했다 수십 년의 매장은 헛잠이 되었다 때로는
덮친 바퀴가 차마 나가지 못한 저 비명을 돌아 금이 간 머리, 수박통처럼 드러날 때
무덤 속에서도 도저히 컴컴해지지 않는 죽음 죽어라고 죽으려해도 죽어지지 않는 죽음 입안으로 들어가서도 미처 말이 되지 못한 말은 잠시 귀속된 시간을 벗었다 입은 것처럼 아직도 죽음으로 들어가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다
땅이 뒤집힌다 시간이 움직인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단지 묵었던 것이므로 추려진 뼈들이 흩어진 살점을 찾아
토치램프의 달궈진 머리통으로 타들어 가는 저녁
고적운 속에는 이장된 해골이 웃고 있다 뒤집힌 땅을 날고있다 수십 년이 비명으로 빠져나가고 수십 년이 한올씩 풀린다
제10회 《詩로 여는 세상》신인상 당선작 황정숙 시인 / 열매에도 붉은 상처가 있었네
벚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듬성듬성 매달린 붉은 버찌 꽃잎이 아문 자국이라네
넘어져 깨진 무릎 근질거림을 참지 못해 잡아뜯은 딱지처럼 그 속에도 붉은 자국은 있었네 얼얼하게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 어머니 죽음이 생각나듯 자지러지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그 아픔이 꽃잎처럼 후두둑 떨어진다네
가슴 속에 상처 하나씩 숨기고 산다는 것 새살이 딱지를 밀어낸 흔적 꽃 진 자리 보아 알 수 있겠네
그 자리에 다시 푸른 잎 돋고 잘 영근 주머니 속에서 붉은 입술들이 물고있는 까만 씨앗들 열매 속 깊이 잘 익어 있었네
황정숙 시인 / 푸른 방
완두콩을 까다가 껍질의 울퉁불퉁한 지문을 본다 이력이 담긴 손금처럼 길쭉한 주머니 햇빛을 향한 콩 꼬투리는 단단하고 열매는 실하다
엄지손톱 꾹 열쇠 돌리듯 푸른 방을 연다 나란히 탯줄에 달린 여린 눈망울들 갑작스런 햇살에 화들짝 놀란다
도화지에 물감 발라 두 겹으로 접었다 펼쳐보면 똑같은 모양이 하나 더 있다 콩 꼬투리 반으로 열면 두 몸이 한 몸을 이룬 부부 같다 연둣빛 날개를 가진 나비 한 마리 금방이라도 무우밭으로 날아갈 듯 손끝만 닿아도 푸른 물 만져질 듯
느닷없이 내게 들어와 마음의 기둥과 기둥을 세워 내 안에 또 하나의 방이 된 그를 위해 압력솥에 밥을 짓는다 밥 끓는 소리가 들린다 콩이 솥뚜껑을 밀어내며 뽀얗게 오르는 밥 냄새
그새 탯줄을 끊고 맨발로 달려온 어린것들이 둥근 밥그릇에 알몸으로 올라 눈을 맞춘다 밥상에 둘러앉은 콩깍지 속 우리 방이 푸르다
황정숙 시인 / 껍데기
초여름 숲에서 만난 낡은 너와집 한 채 오동나무 둥치에 달라붙은 빈집, 매미가 빠져나간 투명한 방
차마 나가지 못한 울음의 자리 손가락 끝에서 부서질 듯 바스락거린다 은둔했던 나무껍질에서 나와 오동나무 귀 아프도록 들려주려 했던 말은 무엇일까 옷 한 벌 걸어두고 어디 갔을까
알맹이 빠진 껍데기 바람에 흔들리는 조등처럼 걸려있다 뱃심 하나로 살던 이 가벼운 몸 손저울로 가늠해 보는데 빈 방은 아직도 새벽 이슬을 기억한다
그 해 여름, 오동나무 관에 달라붙어 울던 그녀처럼 어디선가 산깽깽이매미 산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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