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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권 시인 / 오동, 별자리
오동나무는 오동도의 또 다른 이름 물새가 깃을 채우러 오면 해안선은 파도 소리로 몸을 씻는다
꽃을 벗는 오동나무, 나뭇가지 끝에 닿은 달은 집이 되었다 달무리에 번개가 숨어 있다는 듯 발자국도 없는 새는 천둥의 목청으로 저녁을 부르는 것이다
저 타들어가는 불씨, 노을마저 빗방울 섞인 구름을 덮을 때 오동나무 꽃은 물안개로 점점 피어난다
빗소리를 부르는 오동나무, 저 안으로 들어가면 뻘배를 미는 할머니가 있고 등허리에 금빛 나는 주름 바다를 키운다지
그러나 지금은 초록을 엎지른 바다 금빛 탯줄 달린 계절은 아직인데 오동꽃 향기는 수평선을 넘어 하늘을 넘치게 했다 매지구름이 우거지고 불시에 뻘배와 함께 타는 나의 가계(家系)가 보인다 나는 오동나무 꽃그늘이 뱉어놓은 별자리이다
황종권 시인 / 뺨이 길어지는 오후
가시덤불로 뺨을 부비고 싶었다 참혹이라는 말의 내부에서 성곽이 무너질 때
소매 한쪽이 물들었고, 그걸 균열이라고 발음하면 팔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부르면서 가까워지는 호칭은 사랑을 이루는 호명이거나 혀 돌기로 솟구친 쉼표가 되거나 폐허로 무너진 세계를 최대한 느리게 입에 담는 농담이 되었다
농담을 아메리카노 한 모금으로 적실 때 잇몸이 뜨거웠다 나는 한참을 등 돌린 그림자로 있었다 그림자에는 속눈썹이 긴 짐승이 살았다
어떤 소문은 숙연하도록 엎지르는 물이 되었고 뺨을 자꾸만 길어지게 하였다
그런 오후, 나는 당신의 심장 속에서 첫눈이고 싶었다 기묘한 감정을 수집하는 래퍼가 되고 싶었다
황종권 시인 / 숨이 붉어지는 방
붉은 여우가 왔다 일출이 절벽을 딛고 오기 전에 왔다 목덜미 가진 것들을 파헤치고 왔는지 주둥이가 붉었다
마을에서는 볏이 붉은 것들 몇 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붕에 발자국이 찍힌 것으로 보아 수컷은 아니고 암컷이라고 했다 붉음과 어둠의 경계에 산다는 동백이라는 소문만 들렸다
여우는 향일암 염주를 물고 천 년을 내딛고자 했다 그러나 물고기들 풍경 속에서 헤엄칠 때마다 짓뭉그러진 입술과 타다 만 향기가 절벽을 키우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해일에도 더렵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절벽의 힘으로 몸에 붉은 기운을 밀어 넣는 것들이 있다
제 배설물을 꽃잎으로 바꿔놓는 붉은 여우, 그늘에 들 듯 제 영혼을 동백으로 씻고 있다 저건 그냥 막막한 나무일뿐인데, 봄밤이 들어가는 문이다 들어가면 숨이 붉어지는 방이다
황종권 시인 / 신호등의 뺨
우리는 전혀 다른 색으로 훌쩍거리는 피 냄새를 맡고 있었지만 핏줄을 태우는 구름 앞에서 부동자세였다 학대받지 않는 도로는 없었으므로 미신을 능가하는 속도가 우리의 상처였다 상처에 빛이 고이면 깜빡거리는 뺨이 되었다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황종권 시인 /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당신은 육지를 떠나기 전이면 뒤뜰에 있는 이팝나무 아래로 불러내곤 했지요. 이팝나무 한 뼘 위를 회칼로 그으며, 그만큼 자라면 온다고 무슨 굳센 다짐처럼 말하곤 했지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팝나무 아래에서 키를 재어 보았는데요. 키 대신 등짝에 파도소리가 자라곤 했었지요. 해가 기울수록 길어지는 그늘은 내가 미리 살아버린 주름이었을까요. 이팝나무는 꽃을 버릴 때마다 나이테가 늘어갔던 거예요.
먼 바다에서 당신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물살이, 제가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포구 끝에도 닿는 것일까요. 하얗게 터지는 물살에선 목욕탕 스킨냄새가 나네요. 바다가 물결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결이 바다를 그물처럼 가두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바다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다의 것이었거든요.
어둠이 달을 꽉 가두고 있는 밤은 비가 내렸지요. 어김없이 부엌은 생선 굽는 냄새에 몸살을 앓았고요. 저녁상에 올라 온 민어를 뒤집다가 손등을 얻어맞기도 했어요. 하늘에서도 물고기가 튀는 것일까요. 유리창에 맺히는 빗소리에선 심한 비린내가 나요. 그런 날은 이불속에서 뒤척거리는 일도 조심스러워요. 나는 당신에게 수평선을 그어 주던 아이였을까요.
당신의 주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달의 인력이 오늘밤은 시린 손가락으로 내 발목을 잡는 걸요. 밀물 든 바닷가에선 빗소리가 주저 앉고요. 잃어버린 당신의 키는 언제쯤 만조를 이룰 수 있을까요. 사리※와 같은 당신과 나와의 거리에선 빗소리가 쌓이지요. 비가 오는 밤은 달이 이빨이 아픈 꿈을 꾸는 건가 봐요. 이팝나무에 빗소리를 그어놓으면 우린 한 뼘 지워질 수 있을는지요.
※사리 : 달은 음력 한 달을 주기로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보름과 그믐에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 위에 있게 되는데 이때는 태양의 인력이 합쳐지면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크게 되며 ‘사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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