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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장욱 시인 / 얼음처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

이장욱 시인 / 얼음처럼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다른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 바위 보는 아니다.

굳은 표정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밤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유심》 2013. 3)

 

 


 

 

이장욱 시인 / 개 이전에 짖음

 

 

 이 산책로는 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해. 다정한 편백나무들, 그림자들, 박쥐들

 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

 이런 길에서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도 헤어지는 법이죠.

 

 어제는 죽은 사람과 함께 걸어갔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처럼 그이가 나의 팔짱을 끼었는데

 내 팔이 스르르

 녹아갔는데

 

 기억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앉아 점심식사를 했었잖아요. 보자기라니 우스워.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죠. 오래전에 죽은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낮이고 사방이 캄캄하고 별도 없이 친근한 길이었다. 길을 잃는것이 익숙한 길이었다.

 누구나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왈왈,

 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가

 

 아마도 나는 미래의 당신의 오후의 조용한 기억 속에 담긴

 잼 같은 것인가봐요.

 끈적끈적 흘러내리나요.

 달콤한가요.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짖으며 따라왔다.

 저것은 개이기 이전에 짖음 같구나.

 우리는 검고 맑은 하늘을 향해 일제히 입을 벌렸다.

 

 우리는 편백나무들 사이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 녹아버린 한쪽 팔을 흔들며 안녕,

 하고 인사를

 

 당신은 곧 나와는 다른 기억을 가져요. 그것이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산책이기 이전에 걸음, 새벽이기 이전에 불안이니까요.

 잘 구워진 빵에 빨간 잼을 발라서 꼭꼭 씹어 먹어요. 맛이 있지 않나요? 맛이? 정말 맛이 있어서

 그게 슬퍼서

 

 당신의 얼굴이 다 녹아버렸어요.

 나의 생각은 지금 너무 뜨거워.

 빨갛고 달콤한 잼이 된 것 같아요.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어요.

 

- <발견> 2020, 겨울

 

 


 

이장욱 시인

1968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 노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4년 《현대문학》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정오의 희망곡』이 있고, 평론집 『혁명과 모더니즘』『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가 있음. 2005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제3회 문학수첩작가상 수상. 현재 〈천몽〉 동인.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