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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인 시인 / 우리는 겨울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

김경인 시인 / 우리는 겨울

 

 

1.

분명히 남은 게 있을 거야, 저 아래에

 

나는 바짝 엎드려

바닥에 귀를 대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2.

저 멀리 양팔 없이 펄럭이며 걸어오는 여자,

텅 빈 소매를 파고들어 서서히 부풀리는 바람처럼

불안이 온다

깨진 술항아리에서 데굴데굴 쏟아지는 노란 매화열매를 씹으며

 

3.

향을 피우고

두 번 절을 한다

향에는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스며들어 있다

 

4.

한 접시의 전을 나누어 먹으면서

예의를 연습해야지

향을 피워야지

근사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도록

 

5.

창밖, 캄캄한 밤하늘에 적어둔 아름다운 시구들

부서져 분필가루로 흩날린다

 

(《시로 여는 세상》 2013년 봄호)

 

 


 

 

김경인 시인 / 라푼첼의 방

 

 

긴 치마 그림자 너울지는 방

목 없는 화병이 꽃 그림자를 훔쳐보는 방

화로 잿더미 속엔 두근두근 타다 만 심장 하나

치마 속엔 나오다 만 피투성이 머리가 하나

죽음을 잊은 소녀는 낡은 털실을 풀어 환상을 짜고

첨탑 아래에선 내일이면 막노동하러 도시로 떠날

눈먼 왕자가 마지막 세레나데를 쥐어짜는 방

꿈은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뿔뿔이 달아나버린

나선형 계단 모양으로 꿈틀거리며 늘어지는 긴 혀의 방

지칠 줄 모르고 자라나는 흰 머리카락의 연주, 어지러운 화음

앵무새 깃털을 꽂은 무구의 마법사가 눈을 감고 날아가다 멈추는 방

땅에 뒹구는 흙투성이 혀가 주절주절 써 내려가는 방

흰 우유 가득 담은 항아리를 인 처녀처럼

슬픔이 조마조마하게 창문을 두드릴 때

꿈에 빼앗긴 얼굴만이 절대로 늙지 않고

남아 환대하는 그 방

 

 


 

 

김경인 시인 / 젖은 무화과

 

 

내가 많은 칼날을 낳았을 때

그러고도 접는 방법을 몰라서

피 흘리면서

간절히 두드릴 때

 

스승은 내게 무화과를 건넸다

푸르기도 한 붉기도 한

카다란 눈물 하나를

 

눈물 속에 속속 들어찬

누군가의 살을 꼭꼭 씹으면서

고통이 뿜어내는 향기가

여전히 남은 잇새를 부지런히 핥으면서

 

보았다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빛과

창문에 부딪혀 산란하는 빛이

스승의 얼굴에 남기는 아름다운 얼룩들

 

 


 

 

김경인 시인 / 비의 일요일

 

 

일요일엔 오지 마세요

하얀 빵과 무염 버터, 라즈베리 쨈

이제 다 소용없어요

상자를 묶을 리본 끈은 자려서 영영 묻힌 걸요

 

나는 겨우 터널을 빠져나왔어요

낮게 나는 새떼들이 차례차례 차창에 부딪혀

터진 심장을 허공에 가지런히 눕히는 걸 보면서

 

늙은 거울처럼 몸을 떨면서 내부로 돌아가는

영혼이란 없다는 걸 안 다음에요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 같죠

차는 영원히 무겁고 일요일은,

 

나는 사각의 프레임 단단한 창문,

저 언덕 너머에는 하얀 모래의 사막

혹은

죽은 새의 더미들

 

눈동자, 검은 연못에는

얼음이 얼고

 

물경 얼룩 부서지는 소리

터진 심장을 깁는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

사라지는

일요일엔

 

오지 마세요

항아리는 더 깊어져요

그 속에서 앙상해져 등뼈가 다 드러난 슬픔이

웅크려 운다 해도 그 부드러운 물결이

점점 커져 항아리를 깨뜨린다 해도

 

항아리 바닥에 빠져 시간을 사는 사람은

삶도 죽음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테니까요

 

한 사람을 안을 기쁨의 팔을

갖지 못했으니 나는

뉘엿뉘엿 저무는 고요를 어깨에 덮고

돌아오는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긴 잠을 잘 거예요

 

 


 

 

김경인 시인 / 벚꽃

 

 

그대의 손등에

밤새 맴을 돌다

끝내 녹지 못한

눈송이들이

 

비로소 봄을 흔들어

겹겹 쌓인 마음 토해내다가,

가시 같은 햇살에 아프게 반짝이다가,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휘청이다가,

하얗게 질려

실핏줄 같은 울음 울먹이다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우 쏟아져 버리는

 

 


 

 

김경인 시인 / 사막으로 가는 길

 

 

  봄부터 몸속에서 물소리가 들려왔어요. 나는 아직 사막을 가지도 못했는데 걸을 때마다 물이 찰랑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두 귀가 부풀어 올라 자꾸 몸이 아팠어요. 어느 아침엔 플랑크톤이 식도를 타고 목구멍 아래까지 기어 올라왔어요. 나는 사막을 저벅저벅 걷고 싶은데 무릎을 거쳐 두 귀까지 물이 넘쳐 가라앉는 난파선처럼 자꾸만 비틀거렸어요. 가슴에 가만 손 얹으면 물속으로 가라앉는 쇄골이 느껴져요. 나는 아직 사막에 가지도 못했는데, 눅눅한 내 몸을 말리지도 못했는데, 손끝으로 물이 번져 만지는 것마다 온통 젖어오네요. 나는 아직 사막 위에 뜬 달을 보지도 못했는데 몸속 수문이 열려버렸나, 물은 눈까지 차올라 두 개의 눈동자가 밖으로 쓸려가네요. 나는 흰 모래 아래 누워 바삭바삭한 꿈을 꾸고 싶은데 몸속, 물고기들이 내 심장을 파먹어요. 온몸이 수초처럼 풀어진 나는 아직도 사막에 가지 못했는데.

 

 


 

김경인 시인

1972년 서울에서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문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국문학박사). 2001년 계간 《문예중앙》에 〈영화는 오후 5시와 6시 사이에 상영된다〉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한밤의 퀼트』(랜덤하우스, 2007)와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민음사, 2012)가 있음. 2011년 제1회 시인광장 시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