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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 시인 / 미로 안의 릴리
릴리 나는 지나간다 꽃을 거스르는 심정으로 갈색 붉은 양말을 신고 나침반이 달린 시계와 시계가 달린 나침반 사이를 지나 순서도 모르고 차례도 없이 너머를 넘어 돌아간다 울지 않는 나무와 말하지 않는 새에게 전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주어를 잃어버린 어미처럼 어미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말을 잃은 릴리, 우리는 어느새 단순히, 단순하게 떠오르는 이름들의 후렴구를 닮아 있구나 한 발짝 다가서면 그만큼 물러나는 길 위에서 꽃잎을 헤치며 걷는 심정으로 몸에 그어진 붉은 밑줄을 숨기고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을 밑줄을 숨기고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을 건너뛰는 심정으로 새도 아닌데 꽃도 아닌데
서로의 눈 속에서 겨우 빛나는 인사들 서로의 눈 속에서 다만 사라진 안부들
없는 마음으로도 산단다 릴리, 슬픔 뒤에는 막다른 길 막다른 길을 돌아 막 다다른 내일은 다시 멀어지는 미래 손바닥 위의 모래가 날아오른다 원을 그리며 핵심을 벗어나 모래처럼 미래로 먼저 가 닿는 소리들 검불같이 바스락거리는 이름들
지느러미를 잘라버린 가지의 눈처럼 더듬이를 잃어버린 곤충의 심장처럼
바늘 없는 시계 속 흐린 시계 속으로 달려가는 미완성의 문장들 우리는 후렴구만으로도 살 수 있다 끝없이 끝을 이어가며 끝을 향해 끝을 모르고 속삭이며
녹색 바람을 부른다 녹색 바람이 부른다 맥락 없이 두서없이 릴리, 릴리아나 루릴리 울음을 참는 나무에서 오독을 슬퍼하는 꽃을 지나 울음을 잃어버린 새에게로 릴리, 릴리아나 루릴리
(《시인수첩》 2013. 봄)
김선재 시인 / 기호의 모습과 기호의 마음
여기, 누군가 있었다 직사각형의 마음 위에 마음은 움직이는 것인데 움직이는 방향으로 기울 뿐인데 환부처럼 한사코 꼼짝하지 않는 자리 한곳을 오래 바라본 사람의 눈동자처럼 캄캄하고 한곳을 오래 지킨 사람의 표정처럼 창백한 누군가 있는 안 보이는 자리
상처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요 우리는 항생제처럼 상처를 남발했고 어제보다 나는 조금 더 자랐고 내일보다 나는 조금 더 작을 뿐
이 거리는 해독되지 않은 도형의 모양을 닮았다 동그란 모서리와 날 없는 각을 가진 이 도형은 기록되지 않은 문자를 통해 구전되어온 것 나는 그 모양에 가까워지기 위해 날마다 모퉁이를 돌며 모서리를 지운다 어쩌면 빗방울의 모양으로, 얼룩의 모양으로 변해가겠구나 지운 것을 처음으로 간직할 수 있겠구나
햇볕이 햇볕을 밀려 지나간다 구름이 구름을 끌고 흘러간다 고집을 버리는 고집을 연습하며 습관을 버리는 습관을 위해
여기 누군가 있다 진심위에 얹은 진심의 모양으로 취향을 버린 기호의 모습으로
마음은 말이 아닌데 말은 장난이 아닌데
누군가 떨어뜨린 물방울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우산의 기호처럼 젖어도 젖지 않은 모습으로 한사코 내가 아닌 얼굴로
숨겨지지 않는 내 안의 바깥
『얼룩의 탄생』, 김선재, 문학과 지성사, 2012, 48~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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