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신원철 시인 / 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

신원철 시인 / 샘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히말라야 깊은 산속 가릉빈가 새

청청 수려하다는 그 목청

강화도 보문사 사시예불, 독경하는 젊은 스님의

샘물 같은 목소리가 꼭 그랬지요

그때 나는 대웅전 앞 큰 느티나무 아래 벌렁 드러누워

“아이고 이놈의 절 올라오는 언덕길이 장난 아니네!”

투덜대면서

팔락팔락 나부끼는 잎사귀 사이로

슬쩍슬쩍 엿보이는 흰 구름에게 그 마음을

가만히 내맡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쪽저쪽 처마들이 댕그렁 댕그렁

한 소리 시작하는 거예요

스님도 목탁을 놓고 요령을 흔들기 시작했어요

쨍그렁쨍, 댕그렁댕, 쨍쨍, 댕댕……

이 소리 저 소리 한가운데서

나무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지요

이렇게 수선스러운 절집은 처음이었지만

마음은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지요.

 

 


 

 

신원철 시인 / 낙타처럼

 

 

아 미련한 놈들!

음식에다 온통 고추장만 풀어 놔서

도무지 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밥 한 공기에다 뻘건 깍두기를 접시 째 씹어 먹고

이를 썩썩 쑤시면서

트림까지 꺽꺽 한단 말이야

그게 어디 사람이야, 약대새끼지?

 

지금은 돌아가신 식도락 영감님,

대구서 설렁탕을 한 번 대접했더니 두고두고 투덜거렸는데

시뻘건 깍두기도 걸찍한 돼지 감자탕도 잘 먹는 내가

그저 낙타처럼

남해안, 섬진강, 변산반도, 동해안국도, 미시령고갯길을

투덕투덕 운전하는 뒷자리에서

 

허 그 친구 뭘 먹었길래 지치지도 않누?

 

 


 

 

신원철 시인 / 리노의 석양

 

 

성질 사나운 것,

서녘으로 넘어가면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는다

쏘아보듯

마지막까지 아프도록 눈을 부릅뜨고

하늘가를 빨갛게 핏빛으로 물들인 다음

 

뚝 떨어지는데

감히 마주볼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라

 

가슴에 서늘한 재를 남기는 것이다

피라밋 호수 인디언 거주 지역으로 넘어가면서

 

 


 

 

신원철 시인 / 어느 노시인의 노래

 

 

꿈은 하늘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 아버지 괭이질하시던 밭두렁에 누워 풀피리 불면

그때부터 곧잘 시를 써보이던 하늘,

발간 석양 아래

산새들 무더기로 날아오르고

겨울이면 눈이 지붕 아래까지 쌓이는 산골,

이십 리 산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으나

일곱 색 무지개는 하나씩 꺼지고

아버지의 산비탈 밭 대신 태백의 탄맥을 파내려갔다

죽음을 오르내리며

고생대의 화석을 풀어내자 시가 되었다

봄날 진달래 무더기처럼 피어오르던 광부시인의 꿈

오래지 않아

석탄의 불길과 함께 스러지고

오늘은 서울 가리봉동 골목

좁은 하늘 쳐다보며 옛날을 노래한다

세상은 나를 잊었어도

이따금 청탁 오면 무료로 시를 주고

젊은 시인 찾아오면 호프 한잔 같이 하고.

 

 


 

신원철 시인

1957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2003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무의 손끝』(영언문화사, 2003)과 『노천 탁자의 기억』(서정시학, 2010), 『닥터 존슨』(서정시학, 2014) 《동양하숙》 등이 있음. 현재 〈다층〉 동인이며 강원대학 삼척캠퍼스 영미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