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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아 시인 / 잃어버린 문장
마키야토의 밤이 왔네 라테의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내가 주문한 것은 우유 거품 그리고 네가 서 있는 곳에 대해 말하자면 창밖이라네 쓰고 멀고 축축한 창밖이라네 이곳은 라테의 음악이 흐르는 기억 내가 주문한 것은 마키야토의 시 네가 서 있는 곳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방의 뒷면 같은 창밖이라네 너는 젖은 채 떨고 있지만 네 뒤로, 네가 끝내 발설하지 않던 풍경이 흐르네 창밖은 쓰고 멀고 축축하고 유쾌하네 너는 가끔씩 단맛이 나는 문장
이곳은 라테의 음악이 흐르는 레테의 카페 기억의 뒷면 같은 실내의 공간이지 네가 드리운 가벼운 그림자를 인도풍 찻잔에 담으면 무슨 맛이 날까 고독한 여행자처럼 티스푼을 저어 보네 핸드밀 로스팅 드리퍼 드르륵 시큼한 그림자의 냄새 그림자를 잃어버린 너를 문장에 담을 수 있을 것 같네 그러나 네가 서 있는 곳은 여전히 창밖이라네 행간의 뒷면 같은 창밖이라네 노트 위로 하나 둘 셋 커피 방울 쓰고 멀고 축축한 커피 방울 우유 거품처럼 흩어지는 너 레테의 강으로 흘러가는 라테의 문장들
황수아 시인 / 사라진 동굴
내가 소녀였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동굴에 넣어 두었다. 잘 말린 시 한 편, 하얀 안개 분말 불량식품 도장이 찍혀 있는 추억 한 봉지와 뜻 모를 마음 파편들.
그곳엔 항상 맑은 물이 흘렀지만 때 이른 가뭄이 찾아오면 내 입술은 바짝 말라붙었다. 나는 아프고, 아프지 않기를 반복하는 여인이 되었고 내 언어의 물줄기 위로, 몇 편의 시가 빈 병처럼 춤추다 사라졌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동굴로 찾아와 나를 불러냈고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동굴을 떠났다.
동굴이 몇백 년의 시간만큼 마모되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나는 비밀에 대한 기억의 하나로 동굴을 찾아 나섰다.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손으로 동굴의 입구를 봉합하며 스스로 잊힐 준비를 하는 노후의 여인이 된 것이다.
황수아 시인 / 값싼 커피의 맛
학비 고지서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으며, 나는 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스틸레토힐을 신고 따각따각 가장 이국적인 이름의 커피를 파는 카페를 찾아 다녔다. 뜨거운 커피를 성급하게 마시며 창밖의 빗물을 바라봤다.
하얀 머그잔에 갈색 섵탕을 툭툭 뿌리면 산호세 북쪽 마을은 쉽게 떠오른다. 높은 해발고도로 힘겹게 기어올라 검붉은 화산토양 밑 두꺼운 전공책 한 권을 묻어두고 도망치듯 내려왔다. 뜨거운 커피의 시간은 열대성 폭우처럼 지나가버리고 빗물은 모스신호를 보내듯 창문을 두드린다. 복잡한 커피의 맛은 내가 가장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학문이었다.
황수아시집<뢴트겐행 열차>
황수아 시인 / 손잡이는 태연하다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머물다 돌아갔을까. 하지만 손잡이는 태연하다. 인적의 그늘이 지문처럼 찍힌 손잡이의 언덕 어두운 곳에서도 더 어두운 곳으로 길을 내는, 손잡이의 저녁만큼 쓸쓸한 배경이 있을까.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몹시 신중해 끝내 결단을 유예시킨 사람도 바람에 창을 맡기고 언덕을 내달리는 중세 기사처럼 성급하게 용기 낸 사람도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문은 오래도록 닫혀 있다가도 수일간 열려 있었다.
이 마음들의 길 끝이 열리거나 닫히거나 하나의 정답만을 남겨둔다는 것, 이 사실을 알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 오랜 경험으로 마음이 너덜거리듯 손잡이의 나사가 헐겁다.
오늘도 손잡이를 잡아보지만 손잡이는 태연하다.
격월간《시사사》2017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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