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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업 시인 / 에스컬레이터의 기법
30도의 기울기란 마음이 먼저 쏟아지지 않는 경사 알 수 없는 자력이 몸을 곧추세운다 그냥 밟고만 있어도 높이가 커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굳이 거슬러 내려가지 않고 계단의 물결에 발을 맡길 것이다 거슬러 오르는 멋진 오류는 연어의 일 한계단씩 베어 먹은 사람들의 높은 입 그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날마다 입을 벌린다 외마디 비명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현기증 어떤 뒷모습이라 할지라도 바라보면 쓸쓸하고 꼭 그만큼만 보여주는 생의 짧은 치마 넘치지 않는 저울질로 평등하게 내려놓고 빈 계단만 층층이 접히는 지평선 맞물린 관계 속에 서로 먹고 먹히는 다정한 세계 기울어진 생계를 떠안고 마음이 쓰러지지 않게 흙이 묻지 않는 보법으로 반복되는 생성 소멸 오늘밤 달은 발자국 남기지 않고 가던 길을 갈 것이다
『비의 목록』 ,김희업, 창비, 2014년, 10~11쪽
김희업 시인 / 메주
두문불출한 채 낯빛이 누렇다 수행하는 걸까 숨죽인 채 덮어쓴 이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띄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추위에 갈라터져 메마른 표정에 금이 갔다 너무 오래 묵힌 건가 햇볕도 쬐어야 하건만 방치된 늙은 세월
짚이라도 엮어 자신을 달아매고 싶다던 독거노인
소식 없는 자식들 오지 않는다 흰 곰팡이 검게 피어도 동안거 해제를 알리려는지 닫혔던 방문이 활짝 열린다
이윽고
낯선 사람들 손에 노인의 관이 들려 나왔다
사취가 노인의 죽음을 제일 먼저 알렸다
모처럼 노인은 햇볕 쬘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비의 목록』 ,김희업, 창비, 2014년, 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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