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유미 시인 / 종이 여자
숨기고 싶을 때 확실히 구겨 주는 여자. 헤어지고 싶으면 선혈도 없이 찢어져서 냉정하게 돌아서 버리는 여자. 밤새도록 사랑을 받아써도 바닥을 보이지 않는 여자. 더는 얼굴이 생각이 나지 않아 지우개로 지워버리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여자.
단 한 번의 통정通情에도 까맣게 가슴에 재를 남기는 여자. 만날수록 순수해지는 여자. 풍선보다 가벼워 작은 유혹에도 속마음을 보이는 여자. 싫증나면 접고 접어 학처럼 날려버릴 수 있는 여자. 물방울에도 온 몸이 젖어 버려 물처럼 흐느끼는 여자……
그 백치(白痴)같은 여자. 돌아누우면 또 다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던 여자. 아침이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또 나를 꿈꾸게 하는 여자.
내가, 너 같은 여자, 어떻게 버릴 수 있니?
-송유미 시집 {그대는 선물처럼 내게로 왔다} 에서
송유미 시인 / 항해
- <강아지 나라> 두 여자가 낑낑거리며 강아지에게 운동화를 신긴다. 지하도에서 만원 세일의 신발을 구경한다.
어릴 적 교회당에서 잃어버린 신발은 늘 섬처럼 내 인생을 떠다녔어요. 난 늘 신발을 아끼느라 맨발이었지요. 잠들 때도 가슴에 품고 잠들었지요. 신지 않고 다락방에 모셔두었다가 내 커버린 발을 집어넣을 수 없었지요. 그 신발을 품고 꿈속을 걸어갔지요. 낙타는 내 신발을 부러워했죠. 난 신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죠. 폴리호 태풍이 불던 날이던가요. 자꾸 진흙탕 속에서 미끄러지는 신발 때문에 내 몸이 블랙홀에 빠져들어갔지요. 신발이 없는 삶이 얼마나 편안한지 그때 알게 되었죠. 나는 그래도 잠이 들면 신발 속으로 들어가서 꿈을 꾸죠. 엄마의 자궁같이 따뜻하고 비릿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으면 난 꽃으로 피죠. 나비가 날아오르죠. 모두 모두 나비가 되어 하늘로 떠나고 댓돌 위에 검정고무신들만 남았어요. 이제껏 내가 신은 신발은 몇 척이나 될까요. 종로 앞에서 세종로 앞에서 충무로 앞에서 자꾸만 잃어버린 신발을 신어 봐요. 흩어지는 나뭇잎들은 또 얼마나 많은 바람들이 신다가 버렸는지 셀 수도 없고요.
몸의 감옥을 떠다니는 나뭇잎 한 척.
- 송유미 시집『검은 옥수수밭의 동화』2014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금숙 시인 / 꿈꾸는 섬 외 3편 (0) | 2021.09.03 |
|---|---|
| 류미야 시인 / 물고기자리 외 1편 (0) | 2021.09.03 |
| 김희업 시인 / 에스컬레이터의 기법 외 1편 (0) | 2021.09.03 |
| 황수아 시인 / 잃어버린 문장 외 3편 (0) | 2021.09.02 |
| 정수경 시인 / 꽃 옆에 서있는 돌 외 2편 (0) | 2021.09.0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