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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동범 시인 / 저수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

조동범 시인 / 저수지

 

 

여자가 떠오른 것은 저물녘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여자가 떠오른 순간 파문이 일었고, 파문을 따라 해넘이의 붉은 빛이 넘실댔다.

여자가 떠오른 것은 바람이 잔잔해진 적막 속에서였다. 다시 바람이 불었고, 바람을 따라 산그림자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여자의 등은 단호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다.

등을 돌린 채, 저수지의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바닥의, 깊은 어둠을 굽어보고 있다. 어둠을 훑는 여자의 시선을 따라 저물녘의 마지막 순간이 사라진다.

여자는 무엇을 놓고 왔는지, 하염없이 저수지의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마지막까지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던 것인지, 여자의 시선은 어둠을 처연하게 헤집고 있다. 창백한 어둠 속에 시선을 풀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쏟아지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여자의 양 팔은 저수지의 바닥을 향해 있다. 무엇을 잡으려 했는지, 무엇을 건지려 했는지.

뻗은 손의 끝은 힘없이 굽어 있고 수초처럼, 여자의 팔이 느리게 흔들렸다.

여자의 신발이 발견되었다고도 하고, 여자의 목걸이가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저수지를 향하던 여자의 발자국을 따라 풀이 눕기도 하고 그녀의 구두가 남긴 무늬를 따라 숲의 어둠이 들어섰다고도 했다. 저물녘의 마지막 순간과 해넘이의 산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직, 눈을 감지 못한 것인지, 지금도 여자는

 

 


 

 

조동범 시인 / 어른 어른 그리고 어른

 

 

당신이 나의 오래된 연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해변의 모텔에서 나는 당신의 어린 연인. 당신이 나의 심장을 어루만질 때 느닷없이 나의 가슴은 솟아오른다. 제단에 바쳐진 한 마리 양의 피가 초원에 뿌려지는 꿈을, 나는 꾼다. 먹구름은 고단한 음성을 내뱉으며 한숨처럼 몰려오고, 당신은 나의 성기를 만지며 쉽게 달아오른다.

 

예언자는 어느 곳에 순결한 피를 바치는가. 당신과의 절정이 생각나, 나는 미칠 것만 같고,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의 모텔 침대에 누워 당신의 손을 잡는다. 채 자라지 못한 나의 음모와 무성한 당신의 음모가 만날 때 드라마는 시작된다. 주인공들의 사랑은 아름다우며 삼류들의 갈등은 정해진 결말을 향해 행복을 예고하는가.

 

당신과 나는 드라마를 믿지 못한다. 예언자의 주술처럼 이끌리는 피의 전언도 물론 믿지 않는다. 휴일 오전의 해변 모텔에서 당신은, 그저 내게 미끄러져 들어오고 나는 오로지 담배를 피울 뿐이다. 한쪽 벽에 걸린 교복치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피학의 절정을 감각한다. 가랑이진 곳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당신들은 나를 핥는다. 휴일 오전이고, 해변에는 자살한 연인들의 시신이 밀려오기도 한다.

 

해변의 방풍림이 타오르면 검은 해로부터 어둠은 새어나온다. 교복을 입은 내가 해변 모텔의 현관을 나설 때, 당신은 내게 손을 흔들지 않는다. 기약할 수 없는 검은 해는 이제 천천히 어둠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타오르는 숲을 향해 나는 달려가고, 당신은 가랑이진 나로부터 어른 어른, 공명음처럼 텅 비고 유령처럼 사라진다.

 

 


 

 

조동범 시인 / 렌트

 

 

차창으로 바람은 물렁하게 저녁을 속삭인다. 지평선 너머로 모래바람은 불어오고, 렌트, 당신은 속도를 높여 죽은자들의 지평선 너머를 상상하며 절망에 빠진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흑인 영가의 음역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것은 알 수 없다고 렌트, 당신은 천천히 읊조린다.

 

렌트, 쿵쾅거리는 엔진은 육기통이다. 여섯 개의 피스톤은 단 하나의 속도가 되어 이곳을 떠나려 한다. 죽은자는 어느새 무덤을 나와 붉은 사막과 붉은 언덕이 있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가. 도로의 끝에 과연 끝은 있는가.

 

일기장은 타오르며, 저녁 어스름을 들려주던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진다. ‘누구의 것도 아닌 이번 생이여’라고, 라디오의 늙은 가수는 노래하며 흐느낀다. 렌트, 길의 저편에는 오래 전에 죽은 동물의 냄새가 피어오르는구나. 불길한 무덤처럼 부풀어오르는

 

한줌 태양을 향해, 단 한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생을 향해 렌트, 당신의 속도는 사라지는구나. 핸들을 잡은 나의 손은 렌트, 당신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 채 길의 끝을 그저 가늠해볼 뿐이구나. 내 것이 아닌 별빛을 바라보며 렌트,

 

당신을 바라보며 나는 육기통의 엔진처럼 두근거린다. 어디선가 붉은사막의 밤을 서성이던 여우의 울음소리가, 언제나 허상인 렌트, 당신의 비밀을 속삭인 듯도 하였다. 그리하여 렌트. 쿵쾅거리는 엔진은 육기통이고 그것은 영원토록, 당신과 나의 심박이 되지 못하는구나. 렌트

 

 


 

 

조동범 시인 / B-612

 

 

두 개의 달이 떠오르고 태양은 오래도록 지지 않는다. 낯선 행성의 모래폭풍은 길고 지루했다. 사내는 이윽고 죽음을 직감한다. 지구는 멀었고, 극소량의 외로움과 극미량의 그리움을 견디면 마지막 순간은 잠시, 허기졌다. 지구로부터의 영상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내는 흐느끼지 않는다. 항공우주국으로부터의 장엄한 국가는 석양을 배경으로 엄숙했다. 사내는 합중국의 국가를 따라 부르며 바오밥나무와 사막에 추락한 오래 전의 조종사를 애써 기억해 낸다. 고개를 돌리면 우주는 아름다웠다. 문득 사막의 밤하늘이 생각났지만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그리움이 문득 서글펐다. 오래 전에 잊힌 사랑을 떠올리며 사내는 어느덧 죽음에 이르렀음을 직감한다. 항공우주국은 행성의 좌표를 기록하며 사내의 행성을 B-612라 명명한다. B-612의 사내는 B-613이 발견될 때까지 엄숙하게 추모된다. 사내의 가족에게는 행성의 좌표가 제공되고, 좌표의 방향을 향해 사내의 가족은 추도식을 거행한다. 추도식이 거행되는 거리마다, 절망도 없이 태어난 아이들이 화장실에 모여 수음을 한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의 잘린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더러운 비둘기 떼는 어느새 추도식의 하늘을 가득 메운다. 지구로부터의 영상은 영화처럼, 끊어질 듯 극적으로 이어진다. 영화처럼. B-612의 좌표는 별자리와 무관하게 항공우주국에 입력된다. 사내는 순직 처리되고, 인류의 발자취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된다. 사내에게 남겨진 외로움과 그리움은 그러나 항공우주국에 접수되지 않는다. 두 개의 달과 하나의 태양만이 사내의 마지막을 배웅한다. 합중국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B-612의 좌표로부터 극소량의 외로움과 극미량의 그리움이 끝없이, 끝없이 전송된다.

 

 


 

조동범 시인

1970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와 한신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02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와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을 펴냄.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신대, 백석대 등에 출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