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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회진 시인 / 동백이 피었다
언제쯤일까 십년도 더 지난 그때 날이 하 좋아 어쩌지 어쩌지 발 구르다가 서둘러 찾아간 선운사 입구 동백나무 아래 지금은 시인이 되어버린 동백처럼 여리고 동백씨같이 단단한 그녀와 가슴께로 떨어지는 낮달을 안주삼아 낮술을 마셨네
환한 봄볕 아래 꽃불처럼 피어오르던 얼굴 둘, 그때 동백에 얼굴을 묻고 동박새가 울었던가 안 울었던가 그때 그녀는 동백아가씨를 불렀던가 안 불렀던가 그때 우리는 막차를 타고 무사히 그 풍경을 빠져나왔던가 그예, 동백숲에 붙들렸던가
강회진 시인 / 거기 있던 돌
홉스골 호수에서 가져온 돌멩이 하나 칭기즈칸 고향 다달 오논강에서 가져온 돌멩이 하나
거기 있던 돌은 갖고 놀다가도 제 자리에 두어야 한다 예쁜 돌을 갖고 놀다가 집으로 가져온 이듬해 엄마가 돌아가셨다
몽골 친구 다와자르갈이 내게 한 말.
강회진 시인 / 하마(河馬)
뜬금없이 당신은 하마가 보고 싶다 말했다 끝물의 벚꽃 흩날리고 손과 손 스치며 동물원 간다 봄볕 내려와 따글따글 뒹구는 나무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두어 시간 동안 하마를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무리지어 생활한다던 하마는 심드렁 홀로 집 지키고 있다 이따금 종종종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하마야, 하마야 악을쓰며 불러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하마는 비대한 몸 뒤척이며 누워만 있다 가끔 쫑긋 세워진 아이 손바닥만한 귀를 털어낼 뿐 끙, 돌아눕는 하마의 엉덩이 쪽으로 한 아이가 주먹을 먹였다
오래도록 하마를 바라보던 당신의 눈이 고요해지는 것을 본다 먼먼 생 언젠가는 이번 생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이유도 알수 없이 방바닥을 치며 통곡하던 날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뜨겁게 거절하는 당신을 다음 생에서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당신과 나는 무리를 이탈한 하마인지도 모를 일 불온한 사랑을 꿈꾸는, 하마하마한 우리는 세상이 뭐라 주먹을 먹여도 가만히 두 귀 털어내며 홀로 고요해지고 싶은 건지도
강회진 시인 / 명옥헌
연못 속 백일홍 뚝뚝, 피고 있습니다 여름 하오는 꽃 속에 감겨 느리게 흘러갑니다 바람이 목백일홍 가지를 슬쩍 간질이고는 시치미를 뗍니다 꽃 속으로 숨어버린 바람은 무슨 색일까요 어느 귓결 고운 사람 있어 저 꽃자리와 바람의 울음을 짚어낼 수 있을까요 붉은 꽃 사이 손잡고 거니는 청춘의 목덜미가 하얗습니다 누군가 오래도록 물가에 앉아 꽃을 퍼 올려 얼굴을 닦고 있습니다
강회진 시인 / 달을 베어 먹으며
늙은 책을 펼치자 잎맥 도드라진 나뭇잎 한 장 합장하고 앉아 있다. 책벌레에게 몸 다 공양하고 해탈에 든, 노스님의 옷자락 같다.
눈을 감으니 보드가야 거대한 보리수 숲 일렁이며 내게로 걸어온다.
뚝뚝, 달을 베어 먹으며, 잘린 가지 흉터를 타고, 숲으로 들어가야지. 바람이 불 때마다 화르르 쏟아져 내리는 잎새들, 잎새가 되기 전의 생으로 가 잘 구워진 모래 위에 맨발로 서야지.
달을 반쯤 삼킨 옥탑방, 하늘이 기우뚱한 지붕 쪽으로 바짝 다가온다. 몸 부리는 곳이 높을수록 오히려 견딜 만하다.
보리수 잎새만으로 배부르고 싶은 밤, 천천히 달을 베어 먹으며 거대한 보리수 숲으로 들어선다.
낡은 책을 펼치자 잎맥만 남은 나뭇잎 한 장 두 손 모으고 누워 있다. 책벌레에게 몸 죄 공양하고 선정에 든 노스님의 갈비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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