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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기철 시인 / 당나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0.

전기철 시인 / 당나귀

 

 

나날이 귀가 자란다

귀가 자랄수록 거리에서 들었던

자음들은 모음을 만나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와 내 몸 속을 떠돈다

시끄러운 소리들에

풍경조차 모자를 눌러쓴다

귓속에 든 소리들이 쥐를 낳는다

쥐는 지푸라기를 모으고

지푸라기는 길을 낸다

커지는 귀를 움켜쥐려

모자를 깊이 눌러쓴다

넓은 대로도 귀 안에 갇힌다

쥐똥과 지푸라기들로 난장판이 된

귀에서 낯선 세상은 자꾸 태어나고

수다는 길게 이어진다

 

 


 

 

전기철 시인 / 비눗방울

 

 

사흘은빵집이요닷새는다리께낚시터다저

녁물에는어처구니를만나아삭소리를낼것

이다망설임은보험문제다멀뚱히서있다가

언덕에서굴러떨어져턱이깨진표정이다내

내평화를잃은사내가안절도부절도못한다

저만큼한소녀가앗과엇사이에서발을동동

구른다계절의경계에철조망이쳐지고깨진

목소리에서는그냥이쉬를한다오늘은그믐

과초승의사잇길어둑신한풍경속으로구깃

구깃종이가날아올라앵무앵무들볶아친다

머쓱허공이몇가닥의극사실로헝클어진다

 

 


 

 

전기철 시인 / 손현주가 나오는 영화는 다 본다

 

 

손현주는 부사다. 몸의 명랑, 속으로 빠져들어, 으흥, 식물성으로 히죽거리다가 ‘똥이 탄다, 스벌놈아!’ 바슬바슬한 말에 홀리다가 안방에서 정글로 널뛰는 손현주는 야생동물이다

 

잔웃음을 피식, 비릿해진 머릿속이 깜깜한 밤 속을 거닐고 있을 때, 전화기 속으로 알약을 삼키는 소리를 듣고는 울컥 울컥, ‘이런 법이 없어!’ 허벌나게 깊이 담배의 본능을 빨아들이느라 눈과 입이 따로 노는 손현주는 너무 덥다

 

가끔은 으스대기도, 혹은 어긋나게 나가다가 미래를 향해 질주할수록 과거 속으로 쫓겨, ‘나를 더 괴롭히고 싶다!’ 뾰족한 한 수를 내뱉는, 손현주는 엉큼 쌉싸름한 동사다

 

 


 

 

전기철 시인 / 뜨개뜨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해 쓴다. 분실물에 대해, 잊어버린 꿈에 대해, 중독된 노래에 대해, 그리고 허공으로 도약하고 싶어 한 오래 전에 죽은 친구에 대해, 그의 눈에 대해 쓴다. 물고기의 언어에 대해

 

네 병실은 바흐의 칸타타가 울렸지, 창가에서는 풀잎이 숨 쉬는 소리가 들리고 플라스틱 단봉낙타가 너 대신 백일몽을 꾸었지. 안개꽃 같은 숨결로 너는 말했지. 여기 거울 속 맞지, 나는 눈으로 말했지. 너는 이 지상의 손님이야

 

오늘도 나는 종작없이 걷는다. 찰흙 같은 어둠 속 밤이 너덜너덜하다. 멀리 있는 강이 푸드득거린다

 

크래커로 만든 아이가 있었지. 생쥐를 키우고, 누가 내 머리에 똥을 눴어. 씩씩거리는 아이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말을 거꾸로 했지. 집을 먹었어요. 엄마도 먹고 동생도 먹었어요

 

육식동물들이 길을 메우고, 길 건너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좋아요’를 몇 번 눌렀나

 

거울을 깨고 나온 새, 태양 너머를 힐끗

 

 


 

 

전기철 시인 / 배꼽

 

 

어느 슬픈 총상인가

 

만지면 덧나는 가족사진처럼

 

감춰진 흉터에서는

 

쇳소리가 나고

 

과녁이 똬리를 튼다

 

풍경에 절망한 눈

 

황폐한 길들에는

 

잉크가 묻지 않으니

 

총상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풍경을 잃어버린 도시

 

더 이상 과녁일 수 없는

 

 

문고리보다 단단한 무덤

 

 


 

 

전기철 시인 / 버스는 죽었다

 

 

버스는 죽었다. 총소리가 수상한 거리를 검색할 때 버스는 쓰레기처럼 거리에 버려진 채 문을 열어젖히고 누워버렸다. 죽은 사람들이 버스 안에서 기침을 하고 봄 감기에 떠는 회색 빌딩들이 조곡을 부르고 있었다. 골목 여기저기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몰래 버스를 관찰하고 낡은 하늘에 찢어진 깃발을 내걸었다. 버스는 죽었다. 암호처럼 시체들을 가득 싣고 버스는 죽었다. 세기말로 향하는 길을 뚫어 놓은 채 해독되지 않은 문자로

 

 


 

 

전기철 시인 / 월정리

 

 

말없음으로도 묻지 않는다. 여기서는

 

네모나게 날아가는 바다로 가득한 창문, 고래가 될, 파도가 저만치 부스럭, 해안을 털어내면, 큼큼, 바람개비들이 꿈처럼 비상하는

 

여기는 귀환불능지역입니다

 

한 소식인 듯 바다를 끌고 다니는, 고래가 될, 무게 없는 얼굴로 떠다니는 창문으로, 어제의 비가 내리고, 고래가 될, 바삭한 한 컷의 시선이 한소끔 들어오는

 

해끔한

고래가 될

 

*<고래가 될>은 제주도 구좌읍 월정리 카페

 

 


 

전기철 시인

1954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 전남대와 서울대학 대학원서 석.박사 과정 수료. 1988년 《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비의 침묵』『풍경의 위독』『아인슈타인의 달팽이』『로깡땡의 일기』『누이의 방』등과 평론집 『민족문학과 비평정신』 번역서 『시가 있는 금강경』등이 있음. 현대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을 수상.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며 『유심』 편집위원. 만해학회 회장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