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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순 시인 / 춘자야, 춘자야
경운기 사고로 춘자가 죽은 후 춘자 엄마는 춘식 엄마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뀐 이름이 입에 익지 않은 주위 몇몇이 종전처럼 춘자 엄마라고 불렀다가 그녀의 눈물벼락을 호되게 맞은 이후 잠결에도 화들짝 놀라며 춘식 엄마, 춘식 엄마 열심히 되뇌곤 했는데 오늘 그 이름 때문에 또 사단이 나고 말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춘자가 들으면 얼마나 섭섭하겠냐고 주저앉아 꺼이꺼이 눈물콧물 바람을 하는 통에 더 이상 그녀를 부를 이름이 마땅치 않다 환갑 늙은이를 새댁으로 부를 수 없고 사모님 아줌마 할머니도 아니니 이걸 어쩌간, 이를 어째쓰까 오늘 단오 맞이 계모임에서도 춘자 엄마를 새로이 부를 이름에 대하여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소쩍새가 눈치도 없이 춘자야~ 춘자야~ 밤새 울어댔다
『비둘기 경제학』(시인동네 시인선, 2019)
황상순 시인 / 방울토마토
쥐방울만한 것이, 저도 과일이라고 한 대접 수북 씻겨 내왔다 한 입에 툭 넣기 미안해 반쯤 깨무니 찔끔 토마토 냄새가 난다 어쭈 요것 봐라, 기특하여 손이 계속 나간다
깔보지 마라 작다고 토마토 아니냐, 저도 태어날 땐 가슴에 온 세상을 다 품었으리라 저 낳은 어민 뿌듯한 마음으로 삼칠일을 다 채워 조신하였으리 너는 언제 네 힘으로 작은 생명 하나 키워 본적 있느냐
설령 네 지금 모습이 작고 보잘것없더라도 마음이야 바다처럼 커도 상관없지 않겠니
생각하다가 그만 하나하나 작은 목숨 한 대접을 다 비운다
황상순 시인 / 가정식 백반
얼마만의 푸짐한 식사인가 노숙자 박씨가 오후 늦게 가정식 백반집에서 가정식 백반을 혼자 먹는다 한 상에 이천오백 냥, 소주까지 곁들였다 달걀 프라이 접시 손에 들고 후르륵 짭짭 밑바닥까지 싹싹 핥는다 게눈 감추듯 하나 둘 비어지는 접시들 기어이 밑창까지 뚫려버린 예금 통장 아껴 둔 꽁치구이 일랑 통째로 씹어 삼키려다 커-억, 가시처럼 목에 걸려오는 오글오글 젖을 파는 새끼돼지들 그림 네 '가화만사성'은 어느 벽에 걸려 있느냐 네 어린 돼지들은 어디 가고 없느냐 그만 물에 만 밥알이 되어 둥둥 뜨고 마는 박씨 눈물 찔끔 나게 목구멍이 아파서 숟가락 내던지고 다급히 소주를 들이킨다 쯧쯔, 박씨 그 소주로는 안 되겠소 밥 한 덩이 김치에 싸 꿀꺽 삼켜 보소, 채근하지만 목에 박힌 가시, 너무 깊고 크다 '가정식 백반' 유리문에 서성거리던 저녁 해가 홀 가득히 왈칵 피를 토해낸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곧 불을 켜야 하리라
황상순 시인 / 개구리 울음소리
비 그치고 저녁노을 내리자 개구리소리 요란하다 첫발을 디디니 울음소리 뚝 멎는다 미안하다 놀라지 마라 살짝 지나갈게, 모르는 척 하렴 숨죽이고 걸어도 알아차리고 데록데록 굴리는 저 눈초리! 그래, 그래 기어서 가마 질경이보다도 더 낮게 엉금엉금 기어서가마 나비처럼 배추벌레처럼 작은 몸짓으로만 살아가마
거짓일 걸, 거짓일 걸 발에서 구린내 나는 것들은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어 아무리 감추어도 내가 다 안다 내가 다 안다고 등뒤에서 개구리 일제히 목청을 돋운다
태어날 때 세상을 향하여 소리치던 순수한 울음 다시 울 수 없다면 내 스스로 개구리 될 수 없다면 개구리에게 들키지 않고 지나는 법을 밤 새워 공부해야 한다
황상순 시인 / 어름치 사랑
동강(東江) 어름치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맑고 시린 거센 물살에 쌓아올린 돌탑 나 언제 그대 빈 가슴에 목숨 한 조각 얹은 적 있었던가 혼자 달아오르고 혼자 허물지 않았던가
사랑한 다음엔 미련 없이 죽으리라 흰 배 드러내고 물위로 떠올라 반짝이며 흐르다가 비오리의 한끼 먹이가 되리
내 혼은 수리처럼 날개를 펴고 굽이굽이 강물 위를 날으리라 기화천 계곡 깊은 언저리 늦은 눈발로 날려가 바람꽃 한 송이로 피어나도 좋으리 동강 어름치처럼 목숨 다하여 사랑한 후엔
황상순 시인 / 파꽃
할머니는 싸리 울타리 옆에 손처럼 닳아진 호미로 파밭을 일구었다 할머니, 하고 찾으면 언제나 치마폭 만한 파밭에서 작은 등이 곰실곰실 답했다 봄이 다하기 전 할머니는 마당 한켠에 작은 솥단지를 걸었다
우박 섞인 소나기 퍼붓던 날 파밭의 할머니 흰 저고리 지붕 위에 얹혀지고 동네 사람들은 호상(好喪) 이라고, 할머니가 걸어둔 검은 솥에 뚝뚝 파를 뜯어 넣고 국밥을 끓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여꾼들은 파밭을 뭉개고 지나갔다 파꽃은 흐트러져 꽃상여를 이루었다
황상순 시인 / 옥수수를 기다리며
옥수수를 딸 때면 미안하다 잘 업고 기른 아이 포대기에서 훔쳐 빼내 오듯 조심스레 살며시 당겨도 삐이꺽 대문 여는 소리가 난다
옷을 벗길 때면 죄스럽다 겹겹이 싸맨 저고리를 열듯 얼얼 낯이 뜨거워진다 눈을 찌르는 하이얀 젖가슴에 콱, 막혀오는 숨 머릿속이 눈발 어지러운 벌판이 된다
나이 자신 옥수수 수염을 뜯을 때면 송구스럽다 곱게 기르고 잘 빗질한 수염 이 노옴! 어디다 손을 손길이 멈칫해 진다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솥에 든 옥수수를 기다리는 저녁 한참 꾸중을 든 아이처럼 잠이 쏟아진다 노오랗게 잘 익은 옥수수 꿈속에서도 배가 따뜻하여, 웃는다
황상순 시인 / 흔적 1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황상순 시인 / 첫 경험
순옥이랑 멱을 감고 논둑길을 오다가 줄기줄기 메꽃 위에 오줌을 누었다 분홍색 꽃잎을 잘 맞추도록 순옥이가 꼬추를 곧추 잡아 주었다 다시 멱을 감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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