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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희 시인 / 꽃무릇
무리를 지으면 쓸쓸하지 않나 절간 뜰을 물들이며 흘러나간 꽃무릇이 산언덕을 지나 개울 건너 울창한 고목의 틈새까지 물들이고 있다. 여린 꽃대 밀어 올려 왕관의 군락을 이룬 도솔산 기슭 꽃에 잘린 발목은 어디에 두고 붉은 가슴들만 출렁이는가 제풀에 지지 않은 꽃이 있던가 그러니, 꽃을 두고 약속하는 일 그처럼 헛된 일도 없을 것이지만 저기, 천년고찰 지루한 부처님도 해마다 꽃에 불려나와 객승과 떠중이들에게 은근하게 파계를 부추기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 화사한 말이든 무릇을 앞뒤로 붙여 허망하지 않은 일 있던가 꽃이란 무릇, 홀로 아름다우면 위험하다는 듯 같이 피고 같이 죽자고 구월의 산문(山門)을 끌고 꽃무릇, 불심에 든 소나무들 끌고 간다.
성영희 시인 / 미역귀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 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 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뭇
성영희 시인 / 겨울 숲
겨울 산, 수런대는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물고기들의 을씨년스러운 잔등을 만난다. 꼬리는 하류 쪽으로 꿈틀거린다. 깡마른 나무들이 직립으로 견디는 가잠의 시간들, 고드름이 가시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폭포는 떨어지는 소리들로 얼지 않는다. 튀어나간 물방울들만 빙벽으로 미끄럽다. 뼈를 드러낸 물고기의 잔등처럼 잎 다 떨어진 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는 산등성이
나무들의 귀는 일년생이다. 어떤 소리가 저렇게 앙상하게 남아 저희들끼리 입을 만드는가, 수백 년 동안 자란 물고기들이 산꼭대기를 헤엄치고 있다. 능선 지느러미 겨울을 달리고 있다.
물고기들의 조상은 앙상한 나무들이 줄서 있는 저 산등성이다. 얼음장 밑에 귀를 대 보면 넓은 대양의 물이 가는 줄기로 흘러내린다. 봄부터 여름까지 가득 찼던 푸른 정맥을 닫아 버리고 앙상한 팔로 바람을 겪는 지느러미들
아무리 작은 물고기라도 몸속에 가시를 숨기고 있듯 겨울산, 그 끝없는 능선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잔가시들이 공중을 향해 자라고 있다.
활시위를 당기듯 겨울 숲을 당기는 팽팽한 바람에 능선하나 걸린다. 꿈틀거리며 물살을 타는 지느러미들, 겨울이 느리게 날아가고 있다.
성영희 시인 / 돌을 웃기다
웃음 한번 웃는데 천년이 걸리는 얼굴을 보았어요
오래전 사람들은 저 웃음을 화난 얼굴로 기억 하겠지요
이끼를 아시나요
투박한 표정 하나 웃게 하려고 정 붙일 데 없는 돌을 기어오르는 녹음의 손가락들, 눈비바람 별
온갖 꽃들이 살랑거린다 한들 손가락 간지럼만 할까요
석상 발끝에서 생겨 몇 백 년씩 기어오르는 이끼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돌이 웃을 생각을 다 했겠어요
그저 스쳐 지나는 것들에게 공을 돌리기엔 돌의 미소가 참 묵직하지 않나요
이쯤이면 저도 표정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오래 지키면 부릅뜬 마음도 가물가물 사라지고 말까봐 돌부처도 살살 발가락을 움직였을 거예요
내 얼굴에는 얼마의 시간이 살고 있는 것일까요
성영희 시인 / 자국
이른아침 수북쌓인 눈위로 발자국 하나 찍혔다 마당가 감나무 아래서 시작된아주 조그만 새발자국 무슨말을 남기고 싶었던걸까 총총 뒷산으로 사라진 차마묻어둔 고백 같은 저 말줄임표
성영희 시인 / 사랑
어느 겨울 밤, 비좁은 방안에 옹기종기 잠이 들었다 새벽녘이었을까
생솔가지 타는 냄새에 잠이 깨어 마루에 놓인 요강에 앉아 있을 때였다 부엌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살금살금 일광문 사이로 들여다보는데,
“보슈 애들 깨기 전에 언능유, 그란디 지가 그리 좋남유” “...말허믄 뭣혀”
다다닥 다다닥 아궁이속 생솔가지 불꽃 튀며 타오르고 있었다
201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성영희 시인 / 페인트 공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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