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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태준 시인 / 국화 꽃잎이 마르는 사이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0.

문태준 시인 / 국화 꽃잎이 마르는 사이

 

 

흙을 덮고 누운 벌레 곁에서 마른풀들이 낮동안 아코디언처럼 울어주었다

 

국화 꽃잎을 따다가 습자지에 곱게 포개 두꺼운 갱지를 눌러놓았다 한 주루목의 볕도 들지 않는 곳으로 꽃잎이 누웠다 지하생활자처럼

 

늙은 아버지와 저승꽃이 더 많이 핀 큰아버지가 묏자리를 찾아 산그늘을 옮겨다녔다 벌집을 버린 벌떼들이 밤동안 잠들 또다른 벌개를 찾아가듯

 

-문태준 시인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중에서

 

 


 

 

문태준 시인 / 내 귓가에

 

 

귓가에 조릿대 잎새 서걱대는 소리 들린다

이 소리를 언제 들었던가

찬 건넛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자매가 가끔 소곤대고 있다

부엌에는 한알 전구가 켜져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어머니는 조리로 아침쌀을 일고 있다

겨울바람은 가난한 가족을 맴돌며 핥고 있다

 

 


 

 

문태준 시인 / 옛집에서

 

 

누군가 나의 집을 허물려고 하네

우는 소, 짓는 개를 세워두어도 막지를 못하네

수시로, 혹은 얼마쯤 있다 가끔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정한 찬 바람처럼 와서

옛집의 재산을 들고 가려 하네

옛집의 서까래, 창호, 구들과 벽, 장롱과 의복, 붉은 그림의 부적, 그릇, 동생, 그리고 쌓아둔 모든 것

기다란 나무를 베어들고 가듯 하려 하네

목이 긴 거위, 닭의 볏, 염소의 뿔을 세워두어도 막지를 못하네

들까마귀떼처럼 와서

들까마귀들이 와서

비척비척하는 나의 집을

먼 들녘 곡식 낟알만도 못한 나의 집을

내게는 두개골과도 같은 옛집을

흩어놓고 풀어놓고 무너뜨리려 하네

귀신들

귀신들이 말을 트네

등잔은 켜져 있고

섬돌에는 돌아오는 신발들이 있고

 

 


 

 

문태준 시인 / 장춘(長春)

 

 

참꽃을 얻어와 화병에 넣어두네

 

투명한 화병에 봄빛이 들뜨네

 

봄은 참꽃을 기르고 나는 봄을 늘리네

 

 


 

 

문태준 시인 / 나는 내가 좋다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

예닐곱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

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보지만

나는 내가 좋다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

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내가 좋다

 

 


 

 

문태준 시인 / 풍향계

-애월涯月에서 3

 

 

고내리 어촌계 공동어장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이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바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소라와 보말과 문어를 얻어온다고 했습니다

옆에 앉은 해녀는 열네살에 물질을 시작했다며

칠십년도 더 된 일이라며 앳된 얼굴로 웃었습니다

그녀는 거센 파도 너머에 펼쳐진 아득한 해역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문태준 시인 / 외딴집

 

 

이 수풀은 새소리 하나 일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 수풀에서 새의 둥지를 다 훔쳐가버렸습니다 빈 그릇으로 자루에서 쌀을 퍼 덜어냅니다 물을 떠 온 후 내에 가서 아직 눈이 소복이 덮인 흰 돌과 물의 흐르는 발목을 보고 돌아옵니다 나의 폐는 폐옥이지만 미미하게 새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제게 빛은 넘칩니다 넘치는 빛에 갓 생겨난 근심이 비치다 사라집니다

 

 


 

 

문태준 시인 / 여시如是

 

 

백화百花가 지는 날 마애불을 보고 왔습니다 마애불은 밝은 곳과 어둔 곳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눈두덩과 눈, 콧부리와 볼, 입술과 인중, 목과 턱선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안면의 윤곽이 얇은 미소처럼 넓적하게 펴져 돌 위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도객들은 그 마애불에 곡식을 바치고 몇 번이고 거듭 절을 올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깊은 밤에 홀로 누워 있을 때 마애불이 떠올랐습니다 내 어느 반석에 마애불이 있는지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온데간데없이 다만 내 위로 무엇인가 희미하게 쓸려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 문태준 시인의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중에서

 

 


 

문태준(文泰俊) 시인

1970년 경상북도 김천 출생. 1955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處暑〉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2004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2005년 〈미당문학상〉, 2006년 〈소월시문학상〉, 2014년 〈서정시학작품상〉, 2018년 〈목월문학상〉을 수상.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