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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 국화 꽃잎이 마르는 사이
흙을 덮고 누운 벌레 곁에서 마른풀들이 낮동안 아코디언처럼 울어주었다
국화 꽃잎을 따다가 습자지에 곱게 포개 두꺼운 갱지를 눌러놓았다 한 주루목의 볕도 들지 않는 곳으로 꽃잎이 누웠다 지하생활자처럼
늙은 아버지와 저승꽃이 더 많이 핀 큰아버지가 묏자리를 찾아 산그늘을 옮겨다녔다 벌집을 버린 벌떼들이 밤동안 잠들 또다른 벌개를 찾아가듯
-문태준 시인의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중에서
문태준 시인 / 내 귓가에
귓가에 조릿대 잎새 서걱대는 소리 들린다 이 소리를 언제 들었던가 찬 건넛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자매가 가끔 소곤대고 있다 부엌에는 한알 전구가 켜져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어머니는 조리로 아침쌀을 일고 있다 겨울바람은 가난한 가족을 맴돌며 핥고 있다
문태준 시인 / 옛집에서
누군가 나의 집을 허물려고 하네 우는 소, 짓는 개를 세워두어도 막지를 못하네 수시로, 혹은 얼마쯤 있다 가끔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정한 찬 바람처럼 와서 옛집의 재산을 들고 가려 하네 옛집의 서까래, 창호, 구들과 벽, 장롱과 의복, 붉은 그림의 부적, 그릇, 동생, 그리고 쌓아둔 모든 것 기다란 나무를 베어들고 가듯 하려 하네 목이 긴 거위, 닭의 볏, 염소의 뿔을 세워두어도 막지를 못하네 들까마귀떼처럼 와서 들까마귀들이 와서 비척비척하는 나의 집을 먼 들녘 곡식 낟알만도 못한 나의 집을 내게는 두개골과도 같은 옛집을 흩어놓고 풀어놓고 무너뜨리려 하네 귀신들 귀신들이 말을 트네 등잔은 켜져 있고 섬돌에는 돌아오는 신발들이 있고
문태준 시인 / 장춘(長春)
참꽃을 얻어와 화병에 넣어두네
투명한 화병에 봄빛이 들뜨네
봄은 참꽃을 기르고 나는 봄을 늘리네
문태준 시인 / 나는 내가 좋다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 예닐곱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 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보지만 나는 내가 좋다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 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내가 좋다
문태준 시인 / 풍향계 -애월涯月에서 3
고내리 어촌계 공동어장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이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바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소라와 보말과 문어를 얻어온다고 했습니다 옆에 앉은 해녀는 열네살에 물질을 시작했다며 칠십년도 더 된 일이라며 앳된 얼굴로 웃었습니다 그녀는 거센 파도 너머에 펼쳐진 아득한 해역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문태준 시인 / 외딴집
이 수풀은 새소리 하나 일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 수풀에서 새의 둥지를 다 훔쳐가버렸습니다 빈 그릇으로 자루에서 쌀을 퍼 덜어냅니다 물을 떠 온 후 내에 가서 아직 눈이 소복이 덮인 흰 돌과 물의 흐르는 발목을 보고 돌아옵니다 나의 폐는 폐옥이지만 미미하게 새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제게 빛은 넘칩니다 넘치는 빛에 갓 생겨난 근심이 비치다 사라집니다
문태준 시인 / 여시如是
백화百花가 지는 날 마애불을 보고 왔습니다 마애불은 밝은 곳과 어둔 곳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눈두덩과 눈, 콧부리와 볼, 입술과 인중, 목과 턱선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안면의 윤곽이 얇은 미소처럼 넓적하게 펴져 돌 위에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도객들은 그 마애불에 곡식을 바치고 몇 번이고 거듭 절을 올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깊은 밤에 홀로 누워 있을 때 마애불이 떠올랐습니다 내 어느 반석에 마애불이 있는지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온데간데없이 다만 내 위로 무엇인가 희미하게 쓸려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 문태준 시인의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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