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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삼현 시인 / 지구본 택배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0.

윤삼현 시인 / 지구본 택배

 

 

지구본을 꺼내다가

상자에 박힌 글귀를 꼼꼼히 읽었다

 

-조심히 다루어 주세요

74억 명이 이 안에 숨 쉬고 있으니까요

 

- 직사광선, 화기 등에 가까이 놓지 마세요

극지방이 녹아 해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바닥에 살살 놓아주세요

자칫 지진 소동이 날 수도 있습니다

 

-정밀한 공법으로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지구별은 오래오래 지속되어야 하니까요

 

-한국 일본 사이 바다를 '동해'로 표기하였습니다

지구본은 진실이 생명이니까요.

 

-『지구본 택배』 ,청개구리 2019.

 

 


 

윤삼현 시인 / 스마트폰은 알고 있다

 

 

  젤 친한 친구

  스마트폰이다

 

  퍼즐게임 한 번 하고 나면

  한 시간이 뚝딱 지나간다

  톡톡톡 단추를 두드리다 보면

  바람처럼 시간이 지나간다

 

  공부시간에도

  스마트폰 만지작만지작

  둘이 죽고 못 산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긴장하고 있다

  손 끝 떨림이 말해 준다

 

  사나워진 엄마 눈초리가 자기 때문이란 걸

  진심으로 알아차리고 있다

 

『지구본 택배』(청개구리, 2019)

 

 


 

 

윤삼현 시인 / 시인이 된다는 것

 

 

그래, 그래,

희망의 끝까지

가보는 거다

 

맞아, 맞아

절망의 끝까지도

가보는 거다

 

열정의 바다에

몸 적셔

절이고 절인 넋으로.

 

-윤삼현, <시인이 된다는 것>, <<뻐꾹소리를 따라가다>>, 시와사람, 2009.

 

 


 

 

윤삼현 시인 / 뻐꾹소리를 따라가다

 

 

간밤 가랑비에 목 씻은 뻐꾹소리일 게다

숲과 숲 깨어 일어나 궁글려 소리 넘긴다

세상에 고하는 첫 울음

온 산이 되삼킨다.

 

문득 그건 은자(隱者)의 손, 꼭꼭 숨어 길을 트는...

다시 또 정적과 고요 띄엄띄엄 물소리

긴 여정 생애 이렇듯

울림으로 남겠거니.

 

 


 

 

윤삼현 시인 / 앙코르와트 2

 

 

말없는 바윗돌을 깨고 부수고 다듬으면

돌만으로 도시 하나

거뜬히 세우나니

 

돌들아!

내 안의 돌들아!

너는 무얼 세울 수 있니?

 

 


 

 

윤삼현 시인 / 황홀한 세렝게티

 

 

본능일까

우리는

강을 앞에 두고 있다

 

평원 따라

까맣게

줄 이은 민족 대이동

 

물살은

깊고 세차다

영혼이 부르르 떤다.

 

어느 누가

길을 묻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황홀한

길이 있어

다만 나아갈 뿐

 

사나운

이빨 직감하고서도

강물로 뛰어든다.

 

 


 

 

윤삼현 시인 / 낙엽

 

 

 

여전히 홀로였다

가파른 걸음이었다

세상에 외로운 이

내 하나 뿐일 거라며...

그 때다, 한 걸음 앞서

누군가 걷고 있었다

바짝 낮춘 몸짓으로

총총히 걷는 뒷 모습

가다 서다 내 곁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

나보다 쓸쓸한 영혼 하나

그렇게 동행해 주었다.

 

 


 

 

윤삼현 시인 / 엑스터시스

 

 

만추 끝자락 그녀가 문자를 보내온다

무채색 일상 위에 덧칠하는 열광의 언어

때마침

원효사에서 맞딱뜨린

무등산이 떠올랐다.

 

 


 

윤삼현 시인(아동문학가)

1953년 전남 해남군 출생.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198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뻥튀기'로 당선.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 1986년 [시조문학]으로 등단. 1988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 시집 <유채꽃 풍경><겨울새>, 동화집 <눈사람과 사형수> 등. 순천대학교 겸임교수. 녹조근정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