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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산 시인 / 첫 배를 타야겠다
꼭 한 사람 찾아가야겠다
웅크리고 앉아 바다를 뒤집어쓴 섬이 컥컥, 숨넘어가는 소리로 뒤척여 바다를 잡아당기다 잠을 깼다
섬 홀로 두고 온 날은 꿈도 섬처럼 아득하다
닻을 내릴 틈도 없이 사라진다
팽나무 아래서 슬그머니 바다를 찔러보던 나처럼 지금쯤 섬도 선착장에 앉아 밀물을 집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배가 달려오는 게 아니다
섬도 안다
외로워야 먼길이 가까워진다 찾아갈 사람이 보인다
늦기 전, 첫 배를 타야겠다
이강산 시인 / 목련 주사(酒邪)
반나절 봄비 마신 목련의 치아가 하얗다 입술 틈새 봄 냄새, 독하다
취기에 다리가 풀려 저녁내 휘청거리는 품새론 엊그제 꽃집 트럭 에 치인 무릎은 다 나은 뜻이려니
그 날 분이 덜 풀린 모양이다 저 아래 소주병 들고 가는 남자의 목덜밀 낚아채는 솜씨라니
그것으로 취하겠느냐, 힐끗대는 눈빛이 하얗다
아내 몰래 남자가 숨겨둔 여자를 아는 눈치다 그런다고 지워지겠느냐, 호숫가, 여자의 발자국 따라가 본 듯하다
여자의 이마처럼 항아리 조각 박힌 흉터 한둘쯤 누구든지 품고 견딘다, 독백마저 새하얀 입술 틈새 봄 냄새,
독하다
이강산 시인 / 쑥색
부산 중앙동 가서 시집 받아보니 쑥색이다 떡시루에서 막 꺼낸 쑥떡, 말랑말랑 쑥색이다
아프리카 사막 휘돌아 영도 산복도로 오르내리는 시인 보다 먼 길 걸어온 듯 쉰셋, 생의 발바닥마다 쑥물 든 듯 열어도 닫아도 쑥색이다
저 쑥색의 바다 속으로 시인의 낙타 백 마리쯤 헤엄치겠다 자유의 물고기들 고행이겠다
그리하여 쉰셋의 살점이란 어디를 잘라내도 모름지기 쑥색이라는 듯 시집의 수면부터 심연까지 천연 염색 같은 숙색이다
이강산 시인 / 돌
신포우리만두 열무비빔밥에 돌 여섯이 둘러앉았다 생강, 마른 수세미, 구부러진 못 닮았다
눈 맞고 별 맞고 인간에도 얻어맞아 저 곡선 얻었을 터 살 닿으면 자갈자갈 흉터들이 터질 듯하다
어느 명장이 먹줄을 때렸는지 둥근 몸의 주름살이 등고선처럼 곱다 까마득히 깊다
저 겹겹 속으로 귀뚜라미가 울고 쌍둥이가 떠나고 뽕나무가 자라고 여기까지 떠내려온 물결 같은 길이 흐르고, 그리하여
돌 같은 침묵이다 맨발로 넘은 만악(萬嶽)의 여정 끝이 저 열무비빔밥이라는 듯 한 입, 한 입 침묵이다
이강산 시인 / 겨울, 여름 나무 아래서
이 나무 아래, 여기가 맞다 그 여름을 만난 곳
나는 그때 여름이 감추어둔 겨울을 못 보았다
물끄러미, 세 사람이 나무 밑을 지나 카메라 속으로 들어간다 이제 곧 유리창이 열려있는 시내버스를 향해 찰칵, 찰칵 걸어갈 것이다 나무도 뒤따라갈지 모른다 버스를 놓치면 사람들처럼 그 여름에 닿지 못할 것이므로
이 나무 아래, 여기가 맞다 아이 셋 혼자 키우는 여자를 찍은 곳
나는 그때 여자가 감추어둔 아이들의 겨울을 못 보았다
여름이 그랬듯 여자는 내게 겨울을 감추었지만 카메라는 보았을 것이다, 생각하니 이 겨울이 그 겨울 같다 시내버스는 여름부터 유리창을 열어두었는지 모른다 여자의 겨울이 못내 궁금해 나처럼 가슴 한 겹을 뚫어놓았을 것이므로
여기가 맞다, 이 나무 아래 나 모르게 겨울을 향해 내가 떠난 곳
나는 그때 겨울이 되어서야 여름 나무를 올려다보는 나를 미처 못 보았다.
이강산 시인 / 모항(母港)
바다는 모두 떠나보내고 일몰만 남겨두었다 바다는 잘 익은 감빛이다
겨울 바닷바람에 떨며 나는 저 바다의 숲 왼쪽 모퉁이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감나무 아래 장독대가 있고 앞바퀴가 휘어진 자전거 옆에 쭈그려 앉은 사람이 어머니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나는 방바닥으로 뚝뚝 햇살방울이 듣는 붉은 기와집, 옛집 풍경의 갯벌 속으로 빠져들 것이고 그러면 엊그제 마지막 남은 앞니를 뺀 어머니가 나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릴 것이다
보일듯 말듯, 한 번도 골짜기를 보여주지 않는 바다 한 번도 골짜기를 들여다보지 못한 어머니
그러나 뒤꼍 귀뚜라미 울음 같은, 그 어렴풋한 말이 무슨 말이든 나는 다 알아들을 것이므로 짐짓 못 들은 척 감나무만 바라보다가 나 홀로 서해까지 달려온 내력이라도 들킨 것처럼 코끝이 시큼해지다가
우우우, 원순모음이 새나오는 어머니의 닭똥구멍 같은 입 속으로 피조개빛 홍시 몇 알 들이밀 것이다
- 마포에서 탈출한 곰소 남자, 생의 절반을 잘라냈어요 - 지금쯤 청양 외딴집의 여자 가수는 밤바다를 노래하고 있을 거예요 - 다들 감나무만 바라보고 있을 거예요
바다는 일몰마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았다 나는 저 바다의 숲 어딘가 틀림없이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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