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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외순 시인 / 수박을 읽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1.

황외순 시인 / 수박을 읽다

 

 

  진열대 언저리로 내몰린 수박 한 통

  반쯤 시든 꼭지 보며 선뜻 손이 안 가는데

  번번이 면접에 실패한

  조카 녀석 떠오른다

 

  외모보단 실력이지 등 토닥여 주지만

  입가에 검은 모반(母班) 취업 문 못 열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

  블라인드 채용이라

 

  여민 속 가만 풀자 왈칵 쏟는 붉은 속내

  벼린 칼날 물고 있는 씨앗 하나 옹골지다

  간신히 잡은 그 기회

  놓칠 수는 없다는 듯

 

  -『단편같이 얇은 나는』(고요아침, 2019)

 

 


 

 

황외순 시인 / 눈

 

 

열한 계절을 지나 당도한 편지 한 장

 

지난 일은 모두 덮자, 예서 새로 출발하자

 

심장에 현을 켜는 말

 

시리도록 반짝인다

 

시조집『단편같이 얇은 나는』에서

 

 


 

 

황외순 시인 / 감자

 

 

몸져누운 오랜 날들

기척 한 번 없더니만

 

몇 달 만에 들른 며느리

이내 가는 서운함

 

‘내 아직

안 죽었어야!’

 

새파랗게 눈 흘긴다

 

시조집『단편같이 얇은 나는』에서

 

 


 

 

황외순 시인 / 접시꽃 1

 

 

아, 아

아,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볼륨이 너무 높다

고막에 가득 찬다

 

대낮에

켜진 스피커

먹이려는 말의 은총

 

시조집『단편같이 얇은 나는』에서

 

 


 

 

황외순 시인 / 접시꽃 2

 

 

수십 대의 카메라

담장 밖에 진을 친다

 

새 나오는 숨소리도

빠짐없이 찰칵찰칵

 

특종은 내가 잡는다

너도 나도 줌 인 줌 인

 

시조집『단편같이 얇은 나는』에서

 

 


 

 

황외순 시인 / 책을 읽다가

 

 

권연벌레 새끼처럼 꿈틀대는 글씨들

행간을 넘나들며 생각을 흩는다

잡힐 듯 또 뒤얽히는 여러 겹의 실마리

 

몇 편으로 엮어졌을까, 단편같이 얇은 나는

엉성한 구성의 식상한 기승전결

충격도 반전도 없는

어느새 후반부다

 

모티브는 다르지만 엇비슷이 닿는 결말

너처럼 후회하거나 그처럼 만족하거나

한 호흡 쉬었다 간다,

눈 비비며 발밤발밤

 

시조집『단편같이 얇은 나는』에서

 

 


 

황외순 시인

1968년 경북 영천 출생. 2012년 동아일보와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 시조선집으로『단편같이 얇은 나는』(고요아침, 우리시대 현대시조선 143)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