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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시인 / 고란새
산마루에 살던 날개구름이 종소리를 따라 심곡에 들어 구름을 깨고 부활한다
상상의 새 고란은 짠 눈물이 오색의 물 되도록 날 것들 입에 대지 않고 비린 생각일랑 먼데 두었다
오로지 퉁소 소리 숨결 같은 시 · 가 · 무 어우러지는 봉황에 마음을 두고
대나무의 열매와 빙산에 오색 꽃 피우기 위해 외로움 홀로 익힌다
이정현 시인 / 바람이 분다
늦은 오후 금병산 참나무 우듬지 위에 첫바람이 분다 한나절 내내 모로 세로로 까치발을 세워도 끔쩍 않던 참나무가 흔들린다 바람의 숨결이 닿자 참나무는 열 개의 손 파닥이더니 허공으로 튀어 올라 학이 된다 강을 건너고 하늘바다에 이르러 푸른 물빛 속으로 손을 뻗는다 학의 날개로 뿌리는 물줄기 금병산의 참나무 발밑까지 푸린빛 시원하다 학이 된 금병산 참나무 열 개의 손이 하늘바다를 흔든다 나를 흔든다.
이정현 시인 / 비의 음계를 그려 넣다
오선 위에 비의 음계를 그려 넣는다 팔분음표 바람비와 온음표 소낙비를 라와 파에 걸쳐놓고 비처럼 서서 술을 마신다
조르드 샹드로 향했던 쇼팽의 사랑을 불러와 술잔에 따른다 넘치는 술이 바닥에서 빗소리와 뒹군다
술 속에 빗방울이 추적추적 쏟아지고 음표들도 비에 젖는다 88개 피아노 건반 위로 미끄러지는 음계
쇼팽의 빗방울전주곡이 연주된다.
문밖의 빗소리가 교향곡 15번 2악장 후렴구의 비바체가 된다
이정현 시인 / 시계도 사람이 그립다
수십 년 화장실 벽이 삶터였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살았다
들며 나는 사람들 안녕! 하듯 눈인사도 받고 시원하게 물 내리던 소리도 들으며 그다지 심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베란다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떠가는 구름만 바라보며 하늘바라기하는 신세 집안도 빈 둥지처럼 조용하니 내 마음도 쓸쓸하기만 하다
거실을 들여다보면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닌다
가족이라면서 밥도 함께 먹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사람들
웃음꽃 피우며 퉁탕거리던 띠앗형제들 어디로 갔을까 시계도 사람이 그립다
『각설탕이 녹는 시간』(지성의 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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