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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 시인 / 너덜겅 편지 4 -윤삼현 형님께
온 산에 진달래꽃 가득한 봄입니다 이렇게 대책 없이 봄이 오면 함초롬한 진달래꽃들 앞에서 이 땅의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정든 교단을 떠나는 일은 어린잎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입니다 꽃들이 꽃잎을 열어 향기를 퍼뜨립니다 눈 속에서도 칡꽃이 핍니다* 아이들은 형의 새봄이지요 저잣거리의 진달래꽃들은 오늘도 힘겹게 나부낍니다 아픈 봄이 스스로 환하게 길을 내며 가고 있습니다 작은 마음 꽃향기에 실어 보냅니다 아이들이 가르쳐준 아름다운 마음으로 아픈 사월을 잘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쌍계사의 건립 신화에서 나오는 말
김완 시인 / 너덜겅 편지 5
찔레꽃 향기 알싸한 오월입니다 그대 가신지 6주기가 되는 아침 너덜겅 가는 길은 때죽나무 꽃들의 무덤 하얀 꽃들 땅 위에 지천으로 박혀 있네요 환한 아기 햇살 통통 튀어 다니는 유년의 원산 너덜겅을 거쳐 갑니다 장년의 덕산 너덜겅에 도착하니 크고 검은 바위들 묵언 수행 중입니다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건너는 계절만 바위 사이에서 서로 다른 눈짓을 합니다 바람이 머물다 떠나는 그늘에는 세상을 더 환하게 밝히지 못한 이 시대의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습니다 제 올 때와 갈 때를 아는 꽃을 보며 멀리 떠나 소식 없는 그대를 떠올립니다 수천만 년 동안 제자리에 서서 비바람이나 시절을 탓하지 않는 돌들의 영혼을 생각하는 오월입니다
김완 시인 / 거문도 '고도 민박집'에서
백 년 넘은 일본식 다다미방인 민박집 이층 거문도의 아침이 쿨럭 거리며 깨어난다 오래된 향나무에 살아남은 거북이 할매가 밤새 잘 잤느냐며 눈을 깜박이며 쳐다본다 희미한 여명 속에 이 방 저 방에서는 간밤의 공부를 떠올리며 시업이 한창이다 일출보다 일찍 깬 스마트폰마다 괴발개발 시어를 조율하는 중이다 ‘도란 역사의 보편성이다’는 어젯밤 공부가 어지러운 그림자로 흩어진다 언어란 본래 실체 없는 그림자 같은 것 섬의 시간과 역사가 스며 있는 입추 하루 지난 거문도 '고도 민박집'의 아침 밤이 키운 자식들 아침 햇살에 스러지고 오래된 섬의 하루가 새록새록 깨어난다
김완 시인 / 녹산등대 -시의 길
‘등대는 시인이 가야 하는 종점 같은 곳’ 이생진 시인의 시가 붙어 있다 8월의 칸나가 붉은 눈물 흘린다 후학들도 비명 같은 문장 한 줄 얻고자 가는 길이다 시詩의 열정이 한데 모여 함성을 지른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깎아지른 비렁길 하늬바람이 놀라 하얗게 질린다 망각 속으로 해체되는 무덤 주변에는 쑥, 칡넝쿨, 엉겅퀴만 소멸의 세월을 위로한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여름이 절정인 날 말(言)이란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인데 염천에 시詩가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른다
김완 시인 / 일어서는 강
강물이 깊어지면서 사방이 어두워지자 잔치는 시작되었다 소주잔으로 안부를 건네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생긴 허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돌아가면서 짧은 소회를 나누는 사이 한쪽에서는 어느새 취기가 돌았다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의 시를 낭랑하게 읽자 죽었던 시인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서로들 ‘안 죽고 살아만 있으면 고것이 제일이제‘ 라고 말했다 들뜬 목소리들과 바람이 잔잔해지자 천막 밖 자갈밭이 우리를 불렀다 달빛을 모닥불 삼아 별빛을 가슴에 품고 섬진강의 자갈만큼이나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강은 제 스스로 도달할 곳을 알고 있었고, 아무리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생의 밑바닥처럼 무엇이 두려운지 밤 낚싯대의 야윈 바늘 끝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갈증은 더 심해졌다
새벽녘, 누군가 강을 흔들어 깨웠다 밤새워 숨죽이며 흐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던 섬진강, 새벽마다 아우성치며 그렇게 일어섰다 흐르는 강물 한복판에 서서 목말라 외치는 자 누구인가 수면 위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김완 시인 / 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
벽에 그녀를 걸자, 방이 환해진다 봄 들녘의 바람, 햇살, 상기된 나무들의 숨소리 가득하다 나무들 사이로 하늘이 열리고 둥근 하늘 아래 등불을 든 사람들이 마을을 오간다 부풀어 오른 꽃망울들, 하늘거리는 꽃잎들, 방 안에는 봄의 선, 색, 향기가 넘실댄다 색色은 세상으로 향할 때 비로소 제 안으로 익어가는 것 그녀가 방 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춥고 힘든 오늘, 웅크린 사람들의 외로운 섬에도 봄은 오는가 상한 시간의 기억 다독이며 새해 첫 새벽, 앞산도 지우며 가난한 마음들과 들끓은 소리도 지우며 오는 마른 눈(雪)이여 그리운 풍경에는 원근법이 없다
김완 시인 / 기침에 대한 명상
산등성이 위로 먹구름이 지나자 성긴 눈발이 날린다 휴일 아침부터 발작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온다 머리에 있던 상상 속 죽음이 가슴으로 옮겨온 듯하다 무작정 막무가내로 터져 나오는 기침에는 잿빛 가래 몇 조각이 붙어 있다 말할 수 없었던 말들의 뼈 울음소리가 녹아 있는 지나온 생의 서러운 아우성인가 기침에서 쇳소리가 나는 숨은 온몸으로 남은 생에 대해 경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관지에 좋다며 내게 생강차를 달여 주던 장모님 중환자실에서 내 손 꽉 잡던 애절한 그 눈빛 눈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날 폐에 고인 편견을 퍼내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라고 온몸을 쥐어짜며 숨이 끊어질 듯 기침이 거푸 터져 나온다
―시집 <너덜겅 편지>(푸른 사상, 2014)
김완 시인 /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햇살을 온 몸으로 받고 있다. 가지마다 부푼 꿈을 달고 도시의 구석구석 호위하고 있다.
도시의 거리를 달리고 있는 불빛들 눈부시게 터져 오르는 베를린의 여름밤 밤과 더불어 플라타너스의 잠도 천천히 바래간다.
바람이 불면 불면의 가지마다 낡고 오래된 이야기들이 바스락댄다. 소문이 심상치 않은 조국의 6월 플라타너스는 아직도 마지막 남은 햇살을 곱씹고 있다.
아침이 오면 싱싱한 잎들 금세 수런거리고, 텃새들 분주하게 일상을 물어 나르겠지. 텅 빈 베를린 시내 가득 플라타너스의 숨소리, 당당하구나!
김완 시인 / 물 끓는 시간
나를 덥히려면 당신이 먼저 뜨거워져야 한다. 당신이 뜨거워지려면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 따라 몹시도 서두르는 당신, 맹렬히 타오르며 이곳저곳 나를 자극한다. 당신은 후끈 달아오르면서도 얼굴만 조금 붉힌다. 임계점에 이르면 내 피부에서는 소름이 돋는다. 땀샘이 열리며 가느다랗게 앓은 소리를 낸다. 날름거리는 당신의 혀가 파랗게 날을 세운다. 이윽고 내가 뜨거워지면서 당신은 말을 잃는다. 빠르고 화끈한, 더디지만 오래가는 여러 얼굴을 가진 당신, 당신의 에너지가 늠름하게 쳐들어와 나를 덥힌다. 당신의 몸 곳곳을 뚫고 솟구쳐 오르는 나의 파동들 방울이 점점 커지면서 내 눈이 등잔만큼 열린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 온 몸에서 굵은 땀방울이 솟구쳐 오르고, 환희의 신음소리가 달아오른다. 아득히 천둥번개가 치고 우레 소리가 들려온다. 백팔번뇌가 끓어올라 우리들 사랑이 기화하는 동안 방안에는 고소한 냄새로 가득하다. 파도가 절정에 이르면 소리 없이 스러지듯이 어느 한 순간에는 우리 모두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한다. 자신의 가슴에는 역사를 새기지 않는 물, 그래, 나는 텅 비어 있는 또 다른 물이다.
김완 시인 / 억새에게
탐진댐 수몰지구 거쳐 천관산 가는 길 보이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다. 잠겨버린 물밑의 세상을 기억하라고 시월 갈바람에 기대여 소곤대는 이여!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 탐진강 물 내음 간직한 채 연어와 산천어처럼 헤어져버렸구나! 떠나는 자의 비장함 남아 있는 자들의 슬픔 돌아올 때의 치열함이 대대로 나고 죽는구나!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시간의 물결 따라 빛바래져 갈 때 山 기슭 우뚝우뚝 돌부리로 솟아나 그대와 어우러져 獅子坪을 이루고 있다. 큰 사람의 향기는 죽어서도 널리 퍼지고 아름다움은 거기 그냥 존재하는 것. 물밑으로 잠겨버린 고향산천 지켜보며 그대 스스로 역사가 되어버린 가을 산, 날지 못하는 새 같은 억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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