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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자 시인 / 회양목 어깨 위에는
혼자 어디에서 왔을까? 모여든 사람들 저마다의 소원으로 북적대는 대원사 대웅전 앞 절벽 같은 회양목 어깨 위에 엎드리고 있는 뱀 한 마리,
저 아득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게 부추긴 제 조상 업 닦음인가 제 업이 무언지 모를 수도 있는, 그러나 사탄으로 낙인찍힌 징그러운 저 슬픈 몸,
라싸 조캉사원 향해 길 떠나는 순례자처럼 오체투지로 환생을 꿈꾸며 제 업 닦고 문지르며 저렇게 또아리 틀고 있나 보다
신구자 시인 / 순두부경과 도토리묵경
어느날 두 보살이 관세음보살을 정근할 때 관ㅡ세ㅡ음ㅡ보ㅡ오ㅡ살ㅡ 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우기는 순두부경 보살과 관세음보살 로 정근해야 맞다고 하는 도토리묵경 보살이 서로 옳다고 시비가 붙었것다 그러자 하루는 순두부경 보살이 따끈따끈한 순두부를 가지고 와 스님께 대접을 하면서, ‘스님 제 정근법이 옳다고 해 주세요’ 라고 부탁을 하자 스님은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것다 그러자 역시나 도토리묵경 보살도 질세라, 아늘아늘한 도토리묵을 가져와 스님께 대접하면서 똑 같은 말로 부탁을 드렸것다
드디어 스님은 두 보살을 불러놓고 ㅡ스님 왈, ‘내가 팔만대장경을 두루 살펴보니 순두부경도 맞고 도토리묵경도 맞더라‘며 두 보살의 손을 함께 들어주며 화해를 시켰다고,
장마비가 두서없이 내리는 날, 지오스님의 법문을 듣던 날, 제 목소리만 옳다고 질러대는 깨어진 세상, 서로 헤아리며 다둑거려 줄 그런 큰스님 같은 분 없을까
신구자 시인 / 인연
내가 천상의 별빛을 노래하면 그는 지상의 불빛을 노래하고 내가 가을 산정 갈꽃을 노래하면 그는 녹음방초 질경이를 노래한다
다시 내가 산속 자작나무 잎의 생애를 이야기하면 그는 강가 수초의 넋을 이야기하고 내가 때론 허리 휠 줄 아는 수양버들의 부드러움을 심겠다고 했더니 그는 차라리 푸른 대나무의 부러짐을 심겠다고 했다
나는 달빛에 젖고 그는 햇빛에 건조되며 동쪽과 서쪽 산허리 동여맨 채 절룩이며 황토재 넘어가는 산새 우짖는 소리와 귀 열고 흘러가는 먼먼 개울물소리
신구자 시인 / 중암암 풍경소리
단층 벗겨진 중암암 처마 끝 풍경소리 문밖 서성이는 귀 흔들어 깨우는 가을날 오후
山竹은 나즉히 무릎꿇고 앉아 비파를 뜯는다
내 안일까 밖일까 가슴 문지르며 맑게 씻긴 번뇌의 속옷
신구자 시인 / 깊은 잠
단국화꽃 같은 불빛 창문마다 피어 있는 곳 반짝반짝 별을 만들며 따스한 웃음 안은 채 각자 자기의 숲으로 돌아간다
그런 날 밤은 참방참방 도랑물 소리가 자장가처럼 뇌속을 흐르고 배롱나무 꽃잎 피어나는 소리 다소곳이 곁에 와 눕는다
스르르 물뱀처럼 어망을 뚫고 저 만큼 환히 등불 밝혀둔 수문 열고 나는 깊은 잠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신구자 시인 / 나팔꽃
어쩌다가 매연으로 찌든 이 곳까지 흘러와서 힘겹게 울타리 의지하고 있는가 그래도 한때는 올망졸망 식솔들 거느리고 아침 햇살에 튀어 오르는 싱싱한 숭어같이 희망의 푹죽 팡팡 터뜨리며 환하게 길 밝혔었는데 칠월 땡볕 아래 몸 부빌 곳 찾아 막무가내 허공 속으로 얼레를 풀며 야위어 가는 저 눈물겨운 몸부림
신구자 시인 / 나는, 꽃이야
주저앉기도, 넘어지기도, 깨어지기도 하는, 나는, 꽃이야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꽃이야
매일을 오뚜기처럼 밝은 햇살 쫓아 발돋움 하고 그 누구에게 환한 빛 던져주고 싶어 안달하는,
나는, 꽃이야
나에게 내가 나를 들여다 보며 때론 환한 웃음 선사하기도 하는
나는, 꽃이야
신구자 시인 / 난초꽃 말씀 쏟아놓다
난초꽃 피었다 몇날 며칠 방울방울 봉오리 품고 곧은 성품 밀어 올리더니 어느 날 활짝 향기로운 말씀 쏟아놓다
좁은 공간에서도 저리 당당한 꽃대,
기죽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어두운 터널 통과하면 그 너머 빛이 있다고 넌지시 길 열어 보여주는 환한 저 은근함
신구자 시인 / 한 폭 액자가 되다
나 오늘 유등지 연꽃의 멋진 배경이 되었네 넓은 잎 속에 가려져 옹송거리고 있던 온몸, 활짝 열어 홍소로 맞아주었네 들판을 넘어 수양버들 늘어진 일상사 가지를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 내 등 어루만지며 물매암이처럼 주위를 맴돌며 첨벙이고 있었네 하늘의 구름들도 마치 차일을 펼쳤다 오무렸다 하듯 흰 양떼들 방목하는 그곳에서 주렁주렁 진흙 묻은 신발 탈탈 털어내며 나 기꺼이 멋진 풍경의 한 폭 액자가 되었네
신구자 시인 / 접시꽃
유월 땡볕 아래 접시꽃 피었다 흰, 분홍, 빨강, 저 다소곧한 자태 다가설 수 없는 먼 사랑
그저 바라만 볼 뿐,
해마다 되새김질 하며 땡볕 속 땀 흘리며 하염없이 서 있는 그대
신구자 시인 / 불두화
무슨 연유에서일까 봄산 향해 입술 깨물던 산도화 붉은 피 토하며 목숨줄 끊었네
먼 산 바라기로 하염없던 그 산장 앙상하게 뼈만 남아 바람집 되었네
한 시절 무늬진 인연 지울 수 없었던가 비루먹은 개잔등 같은 불두화만 시린 무릅 감싸안은 채 아직도 그 문전 지키고 있네
신구자 시인 / 망우초 피는 아침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듣는다 딸아이 갓 대학생일 때, 여름날 뭉게구름처럼 뭉게뭉게 수없이 청해 들으며 라일락 향기처럼 서성였다 딸아이 불혹으로 서 있고 나는 이순의 막바지 고개 훠이훠이 넘어가고 있다 헐벗은 마음 속으로 세월의 지문 망우초 피는 소리로 찍고 또 찍으며
신구자 시인 / 몽돌
부서지며 부셔지며 끝없이 사랑의 세레나데 부르며 안간힘 쓰던 새벽바다 푸른 파도여 자그락 자그락 무너지며 닳고 깎여 한 세상 품을 수 있는 몽돌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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