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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길원 시인 / 북한 커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1.

이길원 시인 / 북한 커피

 

 

 북에서도 커피는 마셨지요? 어디예. 당 간부도 아닌데.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한 친구가 우리 집에 커피가 생겼으니 마시러 오라는 거예요. 친구들은 서양 놈들이 좋아하는 커피 맛 좀 보자고 모여 갔었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커피가 안 나오는 거예요. 커피 안 주노? 그랬더니 끓이고 있다는 거예요. 안 주인은 커다한 솥에 커피를 넣고 끓이고 있었어요. 그리곤 한 대접씩 가득 담아 주는데, 어찌나 쓰던지 서양 놈들은 이 쓴걸 뭐 좋다고 마시나 생각했지요. 우유 넣고 설탕 넣어 마시는 건 남쪽에 와서 알았지요. 요로코롬 향 좋고 맛있는데.

 

-『망명북한작가 PEN문학』(2019년 제5호)

 

 


 

 

이길원 시인 / 아침 제비꽃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누군가 싶어 창문 여니

봄바람

뒤따라 온 햇빛

창틀에 뛰어 올라

진진머리 장단에 춤을 춘다

 

눈부신 춤사위

 

짐짓 놀라 들에 서니

제비꽃

사랑에 취해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살랑거리네

 

살아 있어 행복한 날

 

 


 

 

이길원 시인 / 철조망에 걸린 편지

 

 

어머니,

거친 봉분을 만들어 준 전우들이

제 무덤에 철모를 얹고 떠나던 날

피를 먹은 바람만 흐느끼듯 흐르고 있었습니다

총성은 멎었으나

숫한 전우들과 버려지듯 묻힌 무덤가엔

가시 면류관

총소리에 놀라 멎은 기차가 녹이 슬고

스러질 때까지 걷힐줄 모르는 길고 긴 철조망

겹겹이 둘러 싸인 덕분에

자유로워진 노루며 사슴들이

내 빈약한 무덤가에 한가로이 몰려 오지만

어머니,

이 땅의 허리를 그렇게 묶어버리자

혈맥이라도 막힌듯 온몸이 싸늘해진 조국은

굳어버린 제 심장을 녹일 수 없답니다

우리들의 뜨거운 피를 그렇게 마시고도

더워질줄 모르는 이 땅의 막힌 혈관을

이제는 풀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식어버린 제 뼈위에 뜨거운 흙 한줌 덮어줄

손길을 기다리겠습니다

무덤가에 다투어 피는 들꽃보다

더 따듯한 손길을

 

 


 

이길원 시인

1944년 충북 청주 출생. 연세대학교 졸업. 1980년 『시문학』 등단. 시집 『꽃을 심는 손』 『해이리시편』 『어느 아침나무가 되어』 『계란 껍질에 앉아서』 『은행 몇 알에 대한 명상』 『하회탈 자화상』저서 『시 쓰기와 실제와 이론』대한민국문화예술상, 서울시문화상, 윤동주문학상, 천상병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