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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시인 / 당신의 벼랑
마지막 연락선이 바다에 몸을 맡긴다 천천히 박음질을 하며 나아가는 배 꽁무니에 하얀 실밥이 풀려나온다 갈매기들이 머뭇거리다가 선착장으로 돌아간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곳을 잃어버린다 빛과 어둠이 만든 붉은 주름이 조금씩 뒷걸음친다 실핏줄이 돋아난 바다 비문처럼 떠 있는 바지선들 고물이 들썩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당신의 속눈썹 등대의 불빛이 검은 수평선을 향해 뻗어간다 등대의 밑은 어둡다 섬 뒤에 숨은 또 하나의 섬 당신 속에 가라앉는 또 하나의 당신 뒤돌아선 당신의 뒷모습이 벼랑 같다 벼랑의 뿌리를 핥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서로 밀어내며 좀 더 짙어졌을 뿐, 속눈썹 위에 걸려 있는 말들이 파르르 떤다 반환점을 돌 때 우리는 잠시 포개졌다가 다시 멀어진다 마주잡은 손 틈으로 미세한 전율이 지나간다 우리가 실밥 같은 웃음을 주고받을 때 우리의 등 뒤로 먹구름들이 꿈틀대며 몸을 비빈다
신철규 시인 / 영문법 시간
쉽게 오는 것은 쉽게 가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 멀어지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쉽게 오는 것도 쉽게 가고 어렵게 오는 것도 쉽게 간다 나는 쉽게 와서 쉽게 가고 너는 쉽게 와서 어렵게 간다 건너편 플랫폼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저 여자 남겨진 손바닥 지문은 입김을 불 때마다 되살아난다 한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하철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 간절한 것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가라앉고 사람들은 눈을 감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간절했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나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난자를 뚫고 들어간 정자는 도화선의 생을 마감했다 무한한 세포 분열은 죽음을 향해 간다 더 이상 분열될 수 없을 때 눈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지구에 모든 경사가 사라지면 돌은 구르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 태양 별 은하수 빙하 사막 적도 그리고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멀리 있고 멀리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는 너무 멀리 있고 또 너무 가까이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내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햇살이 가파른 경사를 그으며 너무 먼 곳에서 와서 내 가까이에서 부서진다 구르는 돌은 언젠가는 멈추고 이끼가 몸을 덮는다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신철규 시인 / 서울로 못 간 金봉달씨
경찰 나으리, 서울 좀 보내도, 내사 뭐 거게 살러 가나, 봉제 공장에서 손 잘리고 촌에 들어와서 소 몇 마리 키운 게 죄는 아니잖여, 세발소시랑 같은 내 손꾸락 좀 봐, 내가 이 손으로 뭘 하것어, 남의 멱살 잡기도 힘들고 간신히 막걸리 잔이나 들 수 있는 손이여, 손꾸락이 세 개인 놈은 서울 구경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능겨?
경찰 양반, 그냥 조용히 국회의사당 앞에만 있다 올꾸마, 테레비에서나 보던 말린 소똥맬로 생긴 그 건물이 보고 잪아서 그랴, 국회의사당 입구에 쪼르륵 대기하고 있는 소똥구리 같은 승용차들에는 손도 안 댈겨, 트랙터 뒤에 실린 삽이며 소시랑이며 꼬깽이는 뭐냐꼬? 농투성이한테 연장을 와 들고 다니는지 물으면 할 말이 없제
이봐, 형씨, 그만 좀 팍팍하게 굴고 나 좀 지나가게 해도, 내가 돈을 안 냈나 와 톨게이트를 못 지나노, 농가보조금은 다 없어졌제 쌀직불금은 어만 사람이 받아묵제, 간신히 소 몇 마리 키운 거 구제역 땜에 산 채로 땅 속에 파묻으라 카는 게 말이 되나? 겡찰은 궁민이 어려울 때, 힘든 곳에 달려가는 거 아이라, 이럴 시간 있으면 우리 축사에 가서 소들 여물이나 좀 주고 와
경찰 나으리, 서울 갈 차비가 없어서 트랙터를 끌고 나온 겨, 아, 나도 도로교통법 정도야 알지, 자동차 아닌 것들은 고속도로에 못 나오는 거 알고 주말이면 1차선이 버스전용차로인 거도 알지, 여물만 먹고 가만히 있는 소들을 내 손으로는 못 파묻것어, 젖도 안 뗀 송아지들이 무슨 죄인겨
어이, 김순경, 해는 설렁설렁 넘어가는디 니캉 내캉 와 여게서 이래 실랑이하는지 모르것어, 내사 손가락 잘린 데가 욱신거리서 못 있것네, 담에 보면 아는 척혀, 막걸리 한 잔 살 텡께, 할랑할랑하게 살기가 힘든겨, 니캉 내캉 원수진 것도 없는디 와 이카고 있는지 참말로 모르것어, 해는 설렁설렁 넘어가는디
* 내미: ‘냄새’의 방언(경상).
신철규 시인 / 슬픔의 바깥 - 하루살이
밤길을 달려 시골집에 갔다. 통영대전 고속도로에서 무주 IC로 빠져 빼재를 넘어오는 동안 마주 오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헤드라이트 불빛 앞으로 하루살이들만 어지럽게 명멸했다. 시골집에 도착하니 식구들은 모두 잠들어 집안은 괴괴했다. 달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시골집 마당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달빛을 밟으니 발밑에서 뽀드득 소리가 났다, 눈밭을 걷는 것처럼.
다음날 오전 어머니와 면소재지에 있는 농협에 갔다. 앞 유리에 눌어붙은 하루살이의 시체들을 와이퍼로 닦아냈다. 나와 동생의 결혼식 때문에 사과밭을 담보로 잡고 낸 농협 빚과 인삼조합, 원예조합 등에 흩어져 있던 빚들을 지워나갔다. 지난해 빌려 쓴 농약과 농자재 대금마저 치르고 나니 통장이 가벼워졌다. 어머니는 그 많은 숫자들이 영으로 바뀐 것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포근한 봄 햇살로 더워진 공기를 식히기 위해 차창을 내렸다. 어머니가 왼손가락에 침을 묻혀 오른쪽 손등을 문질렀다. 야야, 이것 봐래이. 손등에 점이 난 것 맬로 닦아도 닦아도 안 지워지는 기라. 월면처럼 우둘투둘한 손등에 검버섯이 몇 개 피어 있었다. 눈앞에 하루살이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햇살이 내 가슴을 꾹꾹 밟고 있는 것처럼 따가웠다.
신철규 시인 / 해변의 눈사람
여기는 지도가 끝나는 곳 같다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생각을 멈추어도 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이 되려고 한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되려고 한다
눈사람은 녹았다 얼어붙었다 하는 사람 더 이상 녹지 않을 때까지 타오르는 사람 더 이상 얼어붙지 않을 때까지 흐르는 사람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였다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을까
마음으로 와서 몸으로 나가는 것들 몸으로 와서 마음에 갇힌 것들 굳은 마음 손을 대면 손자국이 남을 것 같은
우리는 여권을 잃어버린 여행자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서로의 발끝만 내려다보면서 손바닥을 펴서 네 심장에 갖다 댈 때 눈 속의 지진 지진계처럼 떨리는 속눈썹
나는 그림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몸을 웅크린다
눈사람의 혈관에는 얼어붙은 피가 고여 있다 모래알갱이가 덕지덕지 붙은 몸으로 거센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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