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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시인 / 가로수
도회지에 사는 동안 나무는 수직상승의 욕망만이 허용된다 길을 닮은 나무 나무는 단 한번 줄기의 높이만큼 가지의 넓이 갖고 싶다 나무는 봄마다 반란을 꿈꾼다 그러나 수성은 번번이 진압된다 점점 좁아지는 뿌리의 폭 허우대 멀쩡한 불임의 나무
이재무 시인 / 아버지
어릴 적 아버지가 삽과 괭이 들고 땅을 파거나 낫 세워 풀 깎거나 도끼 들어 장작 패거나 싸구려 담배 피며 먼 산 바라보거나 술에 져서 길바닥에 넘어지거나 저녁 밥상 걷어차거나 할 때에, 식구가 모르는 아버지만의 내밀한 큰 슬픔 있어 그랬으리라 아버지의 큰 뜻 세상에 맞지 않아 그랬으리라 그렇게 바꿔 생각하고는 하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버지의 무능과 불운 어찌 내 설움으로 연민하고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날의 아버지를 살고 있는 오늘에야 나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애초 큰 뜻 없었다는 것을 그저 자연으로 태어나 자연으로 살다 갔을 뿐이라는 것을 채마밭에서 풀 뽑고 있는 아버지는 그냥 풀 뽑고 담배 피우는 아버지는 담배 피우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늦은 밤 멍한 눈길로 티브이 화면 쫓는 오늘의 나를 아들은 어떻게 볼까 그도 나를, 나 이상으로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 자본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란 아버지는 자본 속을 살다 자본에 지쳐 돌아와 멍한 눈길로 그냥 티브이 보고 있는 거란다 나를 보는 네 눈길이 무섭다 아버지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까지 연장으로 땅을 파거나 서류를 뒤적이거나 라디오 연속극 듣고 있거나 배달되는 신문 기사 읽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에게서 아버지 너머를 읽지 말아다오 이후로도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다
이재무 시인 / 봄 참나무
보는가, 단단한 껍질 속 웅크린 화약 같은 푸른 욕망을 어느 날 다순 햇살 다녀가서 일순 폭발하는, 저 강렬한 순녹의 빛다발 몸 안의 모오든 실핏줄 팽팽히 당겨지는 내연의 숨가쁨 아는가, 참나무는 죽어서도 왜 숯이 되는가를
이재무 시인 / 석모도의 저녁
비오는 날의 바다는 밴댕이회 한 접시,도토리묵 한 사발을 내놓고 자꾸만 내게 술을 권했다
몸보다 마음이 얼큰해져서 보문사 법당에 오르며 생에 무늬를 남기 인연들을 떠올렸다
비를 품고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저녁 깊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오는 날의 바다가 쓰는 생의 주름진 문장들을 읽는 동안 마음의 자루가 터져 담고 온 돌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갔다
얼마나 더 큰 죄를 낳아야 세상에 지고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섬에 와서도 내내 뭍을 울고 있는 내가 싫었다
자애로운 저녁은 어머니의 긴 치마가 되어 으스스 추워오는 몸을 꼬옥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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