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전정아 시인 / 이팝나무 꽃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14.

전정아 시인 / 이팝나무 꽃길

 

 

발안행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니

이팝나무 가로수에 이팝꽃이 쌀밥처럼  피어있다

겨우내 품고 있던 연서들

이팝나무 가지에 고봉밥으로 피었다

허기진 가슴에 곳간을 지어주고

가지마다 한사발씩 쌀밥을 차려

군불처럼 따스해지는 가슴

문득 나는 이팝나무 꽃만도 못하다는 생각

먹구름이 되어  

거리를 배회(徘徊)하던 나

마주친 사람들에게

허기만을 느끼게 해주지는 않았는지

이팝나무 꽃길을 지나치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전정아 시인 / 가리비

 

 

삽교호 조개구이집

양동이 가득 조개가 담겨 있다

화덕에서 번개탄 불이 이글거리고

지지직 코를 파고 드는 조개 익는 냄새

둥근 쟁반에 가득 담긴 큼지막한 조개들

비릿한 바다가 확 달려든다

부채 모양의 가리비

바다가 제 집인 듯 땅그림을 그리며

모래와 뒹굴었을 것이다

허공을 부여잡는 마지막 생의 발버둥

들숨 날숨을 힘겹게 내쉰다

갓 잡은 가리비의 싱싱함에 즐거운 사람들

가리비는 다만 허공을 죄었다 펴며

몸부림을 치고 있을 뿐

뜨거운 철판 위에 올려진 가리비

뿌연 김 내뿜으며 불기운에 익어간다  

바다가 힘겨운 한 생애를 내려 놓는다

다물었던 속살이 쫙 벌어진다

 

 


 

 

전정아 시인 / 도마에 파를 올려놓고

 

 

텃밭에서 뽑은 파 한 뿌리,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을 집어든다

방금 흙을 털어 낸 뿌리가 싱싱하다

파뿌리는 희디흰 백발이다

검은머리 파뿌리란 말처럼

흰머리를 풀어 헤쳤다

뿌리를 키운 파대가리는 단단하고

줄기는 텅 비었다

속을 다 비워야 비로소 파가 되는구나

문득 내 나이를 헤어보니

어중간한 이립의 중간에 서 있다

나는 날마다 채우려고만 하였는데

저 파는 속을 비우고 살았구나

 

도마에 올려진 파 한 쪽

차마 썰지 못하겠다

보글보글 동태찌개는 끓어오르고

 

 


 

 

전정아 시인 / 닭은 알을 품지 않았다

 

 

암탉이 알을 낳고 요란하게 울어댄다

만져보니 따끈하다

 

유정란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생각에 잠긴다

 

후라이팬을 달군 다음 기름을 두르고 반숙을 할까

파와 마늘 당근을 썰어 넣고 찜을 해먹을까

 

닭장에서 사료를 먹고 있는 암탉과 수탉

제 새끼를 주인에게 넘겨주고 모이만 먹는다

 

부화장에서 까온 병아리가 제 새끼인줄도 모른다

 

 


 

 

전정아 시인 / 꽈리

 

 

입을 다문 꽈리

얼굴이 붉다

꽈리는 대낮에도 주홍빛 전구를 켠다

 

스르르 문이 열린다

해산의 기미가 보인다

작은 오두막집은 들썩거리고

 

입을 앙다문 비명 소리

요란한  환호가 집을 뚫는다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정아 시인

1973년 강원도 원천리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 <시와창작> 신인상. 2006년 《문학·선》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오렌지 나무를 오르다』( 문학의 전당, 2010)이 있음.